공자와 상앙의 결정적 차이

12편 안연(晏然) 제7장

by 펭소아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백성을 먹여 살리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만약 부득이하여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대를 포기하거라.”

자공이 다시 물었다. “만약 부득이하여 남은 두 가지 중에서도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식량을 포기하거라. 옛날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곳이 없느니라.”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자공문정 자왈 족식 족병 민신지의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자공왈 필부득이이거 어사삼자하선

曰: “去兵.”

왈 거병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자공왈 필부득이이거 어사이자하선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왈 거식 자고개유사 민무신불립



공자의 이런 정치관을 가장 발 빠르게 실천에 옮긴 사람이 누굴까요? 공자보다 대략 100년 뒤 법가정치가였던 상앙(공손앙)입니다. 자공처럼 재주가 뀌어난 인재를 유독 많이 배출한 위(衛)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에서 재상으로 발탁돼 강력한 중앙집권과 법치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책으로 진나라를 전국7웅의 선두주자로 개조합니다.


상앙이 진효공(영거량)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처음 한 일이 바로 백성의 믿음(民信)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10m 높이의 나무기둥을 도성 함양의 남문에 세워 놓고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황금 10냥을 상으로 준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백성들이 믿지 않자 상금을 황금 50냥으로 올렸고 누군가 재미 삼아 기둥을 옮기자 바로 그 자리에서 상금을 줬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상앙의 말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얻은 뒤 상앙은 엄격한 법령을 반포했습니다.


여기서 ‘나무를 세우는 것으로 믿음을 얻다’는 뜻의 입목득신(立木得信) 아니면 ‘나무를 옮기게 해 얻은 믿음’이란 뜻의 사목지신(移木之信)이란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공통점은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난 뒤 나서 중국 최초의 변법(變法)에 돌입했습니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해 귀족을 관료로 대체하고, 각종 보상책으로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세대수를 늘려 전쟁에 동원할 병력을 늘이는 한편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후한 상을 줘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에 공자가 말한 족식(足食)과 족병(足兵)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상앙의 통치야말로 공자가 말한 정치의 3가지 목적(민생, 국방, 민심)에 부합한 것이었으니 공자 가르침의 진정한 실천가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공자는 이라는 정치의 3가지 목표를 어진 정치(仁政)로 백성을 교화하고 그 문덕(文德)에 감화되게 함으로써 이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상앙은 무차별적인 법 집행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공포와 효율로써 이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유가와 법가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현실적 결과만 놓고 본다면 상앙의 승리입니다. 공자는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인정(仁政)을 실천할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정치낭인(政治浪人)’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반면 상앙의 법정(法政)은 위(魏)나라에서도 꽃을 피웠고 결국 진나라에서 튼실한 열매를 맺어 훗날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아니라 진짜 교훈은 디테일에 숨어있습니다. 공자는 자신에게 나라를 맡기면 한 달 안에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고, 3년이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 했습니다(자로 편 제10장). 또 7년 정도 백성을 교화하면 전쟁에 나갈만하다고 했습니다(자로 편 제29장). 대략 3~7년이면 정치의 3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상앙의 통치기간은 얼마였을까요? 효율을 중시하는 법가 정치인이니 그보다 짧아야 합니다. 하지만 상앙이 전권을 갖고 진나라를 다스린 세월은 무려 19년이나 됩니다. 공자가 약속했던 시한의 3배~6배가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또 그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비극의 씨앗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입목득신이니 사목지신이라 하여 약속한 바를 지킴으로써 백성의 믿음을 얻은 것 같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실제론 법을 지키지 않을 때 혹독한 형벌을 가함으로써 무서워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일례로 법령을 공포한 뒤 백성이 이를 따르지 않자 법을 어긴 진나라 세자의 스승 중 하나는 목을 베고 다른 하나는 얼굴에 먹칠을 가하는 공포정치로 백성의 복종을 끌어냈습니다.


이런 식의 공포정치로 얻은 믿음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은 상앙을 기용했던 진효공이 숨지면서 바로 드러났습니다. 상앙의 공포정치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귀족세력이 진효공의 뒤를 이은 혜문왕(영사‧과거 자신의 잘못으로 두 스승이 혹형을 겪는 것을 목도해야 했던 그 세자)과 결탁해 상앙을 역모의 덫에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상앙이 만든 그 법에 따라 상앙 자신은 거열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족되는 참극을 맞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만든 법에 자신이 죽음을 맞는다는 ‘작법작폐(作法自斃)’라는 고사성어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비극적 결말은 상앙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법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나 친구였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사 그리고 이사를 기용해 법가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 같은 법가 정치인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참담했습니다. 극단적 방식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는 법가의 정치는 스테로이드 약물과 같습니다. 단기간에 폭발적 효과를 거두지만 결국 그 영광과 선수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상앙은 공자가 말한 정치의 3가지 목표를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최단기간에 효율적으로만 달성하려 하다 보니 결국 진정한 민심(民心)을 잃는 우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는 진나라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앙이 야반도주해 국경을 넘으려 했는데 밤에는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법과 여행증이 없는 사람을 재워줘선 안 된다는 법 때문에 문지기와 여관 주인의 문전박대를 받게 된 에피소드에서도 확인됩니다. 그가 개혁대상으로 여긴 기득권 세력으로서 진나라 귀족뿐 아니라 일반 서민의 민심도 얻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공자의 마지막 한마디가 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믿음을 없으면 설 곳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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