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안연(晏然) 제6장
자장이 사리에 밝은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물이 스며들듯이 은근히 헐뜯는 말과 피부에 착착 감기는 비방이 통하지 않는다면 사리에 밝다고 할 수 있다. 물이 스며들듯이 은근히 헐뜯는 말과 피부에 착착 감기는 비방이 통하지 않는다면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子張問明.
자장문명
子曰: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자왈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명야이의 침윤지참 부수지소 불행언 가위원야이의
자장이 무엇이 밝은 것(明)이냐고 묻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생각이나 판단이 분명하고 똑똑하다는 명석하다, 사람이 사리에 밝다는 뜻의 명철하다, 사람이 감출 것 없이 결백하다는 뜻의 명백하다….
공자의 답에서 그 뜻을 유추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2가지 힌트가 나옵니다. 침윤지참(浸潤之譖)과 부수지소(膚受之愬)가 통하지 않는 사람의 덕목과 관련됐다는 것과 그 뜻이 원(遠)하다와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침윤지참은 물기가 스며들 듯이 조금씩 천천히 되풀이되는 참소를 말합니다. 참소란 누군가를 헐뜯기 위해 없던 일까지 지어다 윗사람에 고해바치는 것입니다. 종합하면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말을 천천히 조금씩 주입해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부지불식간에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수지소는 그 반대로 대놓고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누군가를 헐뜯는데 그게 너무 그럴듯해 피부에 착착 감기는 호소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참소와 비방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니 그 지위가 높은 왕이나 대인(大人)의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대인의 지위를 준비하는 군자가 당연히 갖춰야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둘째 그것이 은연중에 이뤄지든 노골적으로 이뤄지든 누군가의 잘못을 보고받을 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줄 아는 능력과 관련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원려(遠慮)와도 통하는 뜻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명철하다 내지 현명하다는 뜻에 부합하는 덕목을 지칭한다는 것이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를 ‘사리에 밝다’는 우리말로 풀어봤습니다. 사리(事理)는 눈앞에 벌어진 현상과 그 배후에 숨어있는 이치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전후 사정과 내막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조직생활을 해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싫든 좋든 사이가 좋은 사람과 사이가 나쁜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평소 사이가 나쁘지 않더라도 라이벌 관계가 되거나 소속 계파가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다르면 괜히 그 사람 발언에 어깃장을 놓거나 그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조직상의 위치로 인해 인위적 은원 관계가 저절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조직을 이끌고 가는 위치에 있으려면 이런 조직 내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해 오불관언의 자세를 취해선 안 됩니다. 설사 자신은 그 어떤 계파에 속하지 않더라도 누가 누구랑 가깝고 누구랑 멀며 누구랑 껄끄러운 관계인지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에 대한 말이 나올 때 어디를 빼고 어디를 더해서 들어야 하는지 사리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공자가 명(明)을 이야기하면서 원(遠)을 들고 나온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사리판단을 하기 위해선 조직 내 계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파활동에 깊숙이 발을 들이는 순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 인간관계를 특정한 계파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기에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또 다른 의미도 숨어있습니다. 조직에서 낮은 자리에 있을 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사심 없이 내려다본다면 이러한 인간관계가 더 명쾌하게 잘 보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기에 갖게 되는 시야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특정 계파의 줄을 잡고 올라간 사람은 왜곡된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지위에 올라섰을 때 자동 획득되는 조직에 대한 통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遠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란 뜻보다는 높은 곳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내려다보는 능력으로 새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봐야 합니다. 단순히 明과 遠을 등치시킨 것이 아니라 明하기 위해선 遠이 필요함을 일깨워준 것으로 새길 때 그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장의 내용은 자장의 질문을 받고 답하는 과정에서 공자 또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논어’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정해놓은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도전에 스승이 응전하면서 잠재된 불꽃이 튀고, 예상치 못한 하모니가 만들어지고, 후대의 창의적 해석이 가미되기를 기다리는 열린 담론의 향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