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떨고 있니?"

12편 안연(晏然) 제4장

by 펭소아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근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다.”

사마우가 말했다. “근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그것만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속으로 돌이켜봤을 때 흠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사마우문군자 자왈 군자불우불구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矣乎?”

왈 불우불구 사위지군자의호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자왈 내성불구 부하우하구



이 장은 얼핏 단순해 보입니다. 군자는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니 자신을 돌아보고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서라고 새기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성인의 반열에 오른 극소수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과연 이 세상 사람 중에 근심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려는 군자라면 마땅히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근심하고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자 표현은 살짝 다르지만 공자 자신도 “군자는 두려워하는 것이 3가지 있다. 천명과 대인 그리고 성인의 말씀이다”(16편 계씨 제8장)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군자삼외(君子三畏)’로 일컬어지는 이 3가지 두려움은 각각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에 대한 것임은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헌데 이 장에선 왜 갑자기 군자는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하는 것일까요?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많은 주석서가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사마우가 사마환퇴의 동생이라는 가설을 끌고 옵니다. 사마환퇴가 호시탐탐 스승인 공자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사마우가 불안해해서 공자가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한 발언이라고.


공자의 답이 제자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맞춤형 솔루션을 제시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1인 맞춤형으로 풀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앞서 살펴봤듯 사마우를 사마환퇴의 동생으로 단정하기엔 모순이 많습니다.


따라서 공자의 답변은 보다 일반적 상황으로 풀어내야 마땅합니다. 앞서 살펴봤듯 사마우는 형제가 없다며 고독을 토로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고민이 많은 사람입니다. 공자가 여기서 말하는 군자론은 바로 그런 실존적 불안을 지닌 사람들을 겨냥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실존적 불안은 싯다르타를 번뇌에 빠뜨렸던 생로병사에 대한 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늙고 병들어 언젠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불안. 다른 사람과 어울리긴 하지만 결코 씻어낼 수 없는 근원적 고독과 우울입니다. 군자가 되려면 시대정신을 깨치는 지명(知命), 지상의 척도를 터득하는 지례(知禮), 인간을 이해하는 지언(知言)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 셋을 깨치면 자연스럽게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근원적 고독과 우울도 초월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군자불우불구’가 그런 실존적 불안을 극복한 군자상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군자삼외’는 인륜 공동체의 미래와 현재, 과거를 염려하는 군자상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군자학은 수제학(덕)과 치평학(도)의 결합이라 했습니다. 군자불우불구가 수제학적 군자상을 밝힌 것이라면 군자삼외는 치평학적 군자상을 언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憂)와 구(懼)의 대상이 실존적 불안이라면 외(畏)의 대상은 공동체의 안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우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차이를 꿰뚫어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근심하지 않고 두려움만 없으면 정녕 군자라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물은 것을 치평학 없이 수제학만으로 군자가 될 수 있느냐는 반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 반성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바로 잡아가라는 공자의 답은 2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수제학적 접근을 통해 불우불구의 경지에 이르면 치평학적 군자삼외의 경지에 절로 이를 수 있으니 군자라 칭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사마우의 경우 치평학은 일정 경지에 이르렀지만 수제학이 부족하기에 이를 독려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성리학자들은 두 번째 해석에 초점을 맞춰 사마우의 인덕이 부족하다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존적 불안에 예민한 사람은 인덕이 부족한 것일까요?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마우처럼 실존적 불안감이 큰 사람일수록 영혼의 내면을 너무 응시하는 것보다는 반대로 정치공동체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명, 지례, 지언과 같은 거대담론에 매달리다 보면 개개인의 실존적 문제에 너무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합니다. 인도 대륙의 통일왕조 수립에 성공했던 아소카왕과 카니슈카왕 그리고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를 세운 정복군주 양무제가 돌연 독실한 불교도가 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거대담론에 매몰돼 영혼이 피폐해지자 반대로 실존적 문제를 파고든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군자학의 도와 덕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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