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선진(先進) 제18장
공자가 말했다. “안회는 거의 이뤘지만 번번이 손에 쥐는 것이 없었고, 단목사는 운명에 안주하지 않고 재산을 증식했는데 예측하면 번번이 맞아떨어졌다.”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자왈: 회야기서호 누공 사불수명이화식언 억즉루중
공자가 맘속으로 가장 아꼈을 두 명의 애제자에 대한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장입니다. 똑똑하기로 1,2위를 다퉜던 안연(안회)과 자공(단목사)의 장점을 언급하면서 문학적 표현으로 그 대조적 면모를 포착해냅니다.
안연에 대해 평가한 원문의 서호(庶乎)는 ‘거의 다 이루다’는 뜻의 숙어로 해석해 안연이 군자학의 정수를 거의 다 꿰었다는 찬사의 뜻으로 새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누공(屢空)이란 표현은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자공에 대한 찬사와 대비를 이룹니다. 바로 하늘이 정해준 운명에 안주하지 않고 재산을 증식하는 재주가 탁월했다는 찬사입니다.
주희 같은 도덕주의자들은 자공이 장사치처럼 돈이나 밝힌다고 못마땅한 뉘앙스를 담았다고 해석하는데 어불성설입니다. 공자는 사치하는 것을 경계했지 재산을 불리는 화식 자체를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군자라면 마땅히 나라의 재정도 관리해야 하는데 이때 화식의 능력은 칭찬받아 마땅하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연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최후의 순간까지 안빈낙도를 실천하다가 숨졌습니다. 공자는 이것이 못내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헌데 자공은 그와 정반대로 재테크의 귀재였습니다. 안연이 가난이란 운명을 타파하지 못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산 ‘아모르 파티’의 실천가였다면 자공은 그런 운명에 맞서 엄청난 재산을 일궈낸 운명의 개척자였습니다. 공자는 안연과 대비되는 자공의 그런 면모에 나름 특급 칭찬을 보낸 것입니다.
따라서 안연에게 쓴 屢空이란 표현은 그런 자공의 장점과 대비되게 ‘번번이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로 풀어내는 것이 절묘한 대비의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안연은 학문의 성취에 있어선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운명에 안주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 간 반면 자공은 학문에선 안연에 뒤질지언정 타고난 운명에 맞서 세속적 출세에 성공함으로써 안연과 또 따른 길을 개척해 갔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屢空의 뜻을 풀어내면 자공에게 쓴 ‘억즉루중(億則屢中)’의 의미 또한 대조적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자공은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래를 예측할 때가 많았는데 그것이 ‘번번이(屢) 잘 맞아떨어졌다(中)’는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공자는 이런 자공에게 그럴 시간에 공부를 좀 더 하라는 지청구를 날린 적이 있습니다(14편 헌문 제29장). 또 ‘춘추좌전’에서도 자공의 예측이 맞았을 때 공자가 “불행히도 단목사의 말이 맞아떨어졌으니 앞으로 말이 많아지겠구나”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희는 이를 토대로 이 역시 자공에 대한 비판의 함의가 담겼다고 해석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역시 과도한 해석입니다. 안연을 칭찬하다가 그 안연의 아쉬운 점을 채워주는 자공의 장점을 거론하던 중 누(屢)와 공(空)이란 표현과 대구를 이루는 자공의 또 다른 특징을 순발력 있게 언급한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럼 안연과 균형이 안 맞는다고 여길 순 있습니다. 안연에 대해선 장단점을 모두 짚었으면서 자공의 단점은 왜 지적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연에 대해 이미 완벽에 가깝다는 상찬을 함으로써 자공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못 박아 놓은 마당에 굳이 다른 단점을 들먹일 필요를 못 느끼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안연이 공자에겐 ‘엄지 척’의 대상인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기도 함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연에 가려 그 빛을 못 본 자공은 그에 비하면 검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장 쓸모가 많으면서도 혹여 잘못될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든든한 두 번째 손가락 같은 제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