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선진(先進) 제16장
계씨는 주공보다도 부유했건만 염구는 그를 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재산을 불려주었다.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그를 공박해도 좋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계씨부어주공 이구야위지취렴이부익지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자왈 비오도야 소자명고이공지 가야
여기서 계씨는 노나라 삼환 가문 중 최대 실세인 계손씨 가문의 8대 종주인 계강자(계손비)를 말합니다. 주공은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자 노나라를 처음 봉분받은 사람이니 노나라 공실의 시조에 해당합니다. 노나라의 대부인 계강자가 노나라 공실의 시조이자 주나라 섭정공이었던 인물보다 부유하다니 우회적이지만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염구는 ‘공자 귀향 프로젝트’를 위해 계강자의 가재(家宰)로 파견된 염유입니다. 13년에 걸친 공자의 천하주유가 아무런 소득 없이 무산되자 제자들은 스승이 모국인 노나라에서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나라 최대 실세인 계강자 회유에 나선 것입니다. 그 선발공작대로 파견된 염유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결국 공자의 무사 귀국을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그 성공에 취한 것일까요? 아니면 숨겨뒀던 입신출세의 욕망이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요? 16편 계씨 제1장에서 살펴봤듯이 염유가 공자의 가르침을 거스르거나 뿌리치며 계강자와 한통속이 되어갑니다.
특히 이 장에 나오는 내용은 ‘춘추좌전’에도 등장합니다. 공자가 노나라로 귀국한 해인 노애공 11년조(기원전 484년)와 그다음 해인 12년조(기원전 483년)입니다. 11년조 말미에 계강자가 토지의 크기에 따라 징세와 징병의 의무를 부과하는 전부법(田賦法)의 세율과 징병 부담을 늘리는 법을 제정하려 하면서 염유를 통해 공자의 의견을 세 차례나 묻습니다. 공자는 “잘 모른다”면서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염유에게는 개인적으로 그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2년조 1월 결국 계강자의 뜻대로 새로운 전부법이 시행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염유가 공자의 질책을 받았다거나 파문당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춘추좌전의 기록과 논어의 이 장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전직 대부로서 국가적 원로 대접을 받던 공자도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것을 계강자의 직속 수하인 염유가 어찌 반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국법으로 통과된 것을 실행했을 뿐인데 정작 전부법 개정에 제대로 반대조차 못한 사람이 염유에게 파문에 준할 정도로 분풀이를 한다는 것이 얼핏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 장의 내용은 노애공 11년이나 12년에 벌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단 몇 년 뒤 벌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염유가 스승의 뜻을 계속 거스르며 계강자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대부 반열에 오르며 양심을 팔아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을 지켜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됐을 것입니다. 그 무렵 염유의 가렴주구(苛斂誅求) 행태가 공개적으로 성토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출세욕에 눈이 먼 제자가 주화입마(走禍入魔) 내지 흑화(黑化)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승이 최후의 충격요법을 채택한 것 아닐까요?
그럼 이 사건으로 염유는 공문에서 끝내 파문당한 것일까요? ‘논어’와 ‘춘추좌전’을 비롯한 어떤 문헌에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제자를 내쳤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반대로 염유와 그 못지않게 공자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재아는 문묘에 공문십철이란 이름 아래 나란히 배향돼있습니다.
이를 감안해보면 스승의 혹독한 비판을 받은 염유가 스승과 동문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사제관계를 계속 유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처세술이 남달랐던 염유가 비단 스승의 영향력뿐 아니라 노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의 관직에 상당수 진출해 있던 공문의 영향력을 함부로 무시할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공문 내부의 신망이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을 것이고 염유 자신도 현실정치에 맛을 들인 탓에 스승이 죽고 난 뒤에는 공문과 소원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공자가 죽었을 무렵 염유의 정치적 지위가 상당했을 것임에도 장례와 사후처리 관련해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런 점에서 염유는 유학을 오로지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던 무수한 식자와 먹물의 원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염유를 자신의 제자 중 빼어난 10명 중 1명으로 꼽은 사람이 바로 공자 자신이었으니 자기 발등을 자신이 찍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자가 인간적으로 다가서기도 합니다. 예수 제자에게 비유하자면 가롯 유다에 필적할 터인데 공자는 그런 염유도 끝까지 내치지 않고 품에 안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