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선진(先進) 제13장
노나라 사람들이 노나라 공실의 창고인 장부를 개축하였다. 이에 민자건이 말했다. “옛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어째서 고쳐 짓는다 말인가”
공자가 말했다. “저 사람은 말이 없지만 한번 말을 꺼내면 꼭 핵심을 찌르는구나.”
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
노인위장부 민자건왈 잉구관여지하 하필개작
子曰: “夫人不言, 言必有中.”
자왈 부인불언 언필유중
민자건은 공문십철의 한 명으로 덕행에 있어서 안연 다음으로 꼽힌 인물이며 효행에 있었선 ‘효경’의 저자로)‘ 알려진 자여(증자)를 능가하는 최고의 제자였습니다. 고사를 취합해 당나라 때 편찬된 ‘예문유취(藝文類聚)’에는 민자건의 효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민자건과 그의 남동생은 어미를 일찍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계모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만 예뻐해 두터운 솜옷을 입히고 민자건 형제에게는 갈대꽃으로 엮은 엷은 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자건이 아비의 출타를 돕기 위해 수레를 몰고 가던 중 추위를 견디다 못해 말고삐를 놓치게 됩니다. 그제서야 아들의 옷깃을 만져본 뒤 실상을 파악한 아비가 계모를 내쫓으려 합니다. 민자건은 이를 극구 만류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헐벗는 사람이 저 하나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면 되면 네 형제 모두가 헐벗게 됩니다.”
중국에서 효행의 최고봉은 순임금입니다. 계모와 이복동생은 물론 친부의 미움까지 사서 목숨을 잃을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지만 한결같은 효심과 우애를 잃지 않아 천하를 감복시켰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순임금의 초인적 효행과 비교해 봤을 때 민자건의 효행은 납득할 만큼 합리적이고 인간적입니다.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서의 효는 아니지만 공자가 강조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지가 엿보이는 효입니다.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민자건은 공자보다 열다섯 어린 제(弟) 계열 제자로 스승보다 앞서 숨을 거뒀습니다. 대략 오십 대에 숨진 탓에 그 학맥이 끊긴 것으로 보입니다. ‘논어’에서 민자건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모두 5장인데 모두 찬사 일색입니다. 계손씨의 읍성인 비읍의 읍재를 제안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할 만큼 청렴하면서도 덕행과 효행이 뛰어난 모습니다. 공자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을 만큼 어려워한 외제자(畏弟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스승인 공자가 덕행에서 그을 앞선다고 평가받았던 안연에겐 애정공세를 퍼부었다면 민자건에겐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연과 마찬가지로 수제파의 면모가 돋보이다 보니 이번 장에 대해서도 멀쩡한 옛 창고를 허물고 새 창고를 짓는 바람에 백성을 수고스럽게 한다는 주석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은 장부(長府)를 노나라 공실의 보물창고 내지 그 창고를 관리하는 관부로 풀이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仍舊貫如之何(잉구관여지하)’의 관(貫)을 돈궤미로 풀면서 장부가 노나라의 새로운 화폐였다고 주장합니다. 춘추시대 말기가 되면 칼 모양의 도폐(刀幣)와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전 모양의 원전(圓錢)이 도입되기 때문에 무리한 해석은 아닙니다. 불필요한 화폐개혁으로 백성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 것입니다. 역시 애민(愛民)의 관점에 선 보수적 해석입니다
하지만 ‘춘추좌전’에선 장부가 특정 장소로 등장합니다. 노소공 25년(기원전 517년)조를 보면 노소공이 장부에 머물다가 돌연 직할 병력을 이끌고 수도인 곡부에 있는 계평자의 사저를 급습합니다. 노소공의 병력에 포위당한 계평자가 자택의 높은 곳에 올라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수도 곡부 밖에서 죄를 청하며 대기하겠다고 호소합니다. 노소공은 삼환이 쥔 실권을 되찾기 위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계평자를 주살하려고 합니다.
사태를 관망하던 삼환의 다른 두 가문인 숙손씨와 맹손씨가 이런 노소공의 속내를 읽고 사병을 동원해 노소공을 포위하고 압박하게 됩니다. 사세가 불리해진 노소공은 결국 이틀 만에 제나라로 망명을 떠나고 노소공의 동생 노정공을 제후로 옹립한 삼환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집니다.
장부는 이렇게 삼환을 제거하기 위해 노소공이 기획한 역(逆) 쿠데타의 근거지였습니다. 조선의 정조가 왕실 강화의 무력적 배경을 삼은 수원 화성과 비슷한 위상을 지닌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민자건의 발언을 음미해 보면 그 발언이 수제의 차원뿐 아니라 치평적 차원까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노소공이 장부를 신축할 때 그 숨겨진 목적을 꿰뚫어 보고 그것이 실패할 것까지 내다봤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공자 역시 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민자건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민자건이 인격수양에만 힘쓰는 수제파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륜 또한 뛰어난 치평파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자는 노정공 시대 노나라 조정에 출사하면서 삼환의 근거지 약화를 위한 ‘삼도도괴(三都倒壞)’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로 자로를 필두로 한 공문의 제자들을 계손씨 가문에 파견 보냅니다. 민자건이 비읍의 읍재를 제안받은 것 역시 이 즈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민자건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정통성이 덜어지는 세력에 빌붙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스승의 큰 그림에 맞춰 ‘트로이의 목마’로 파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했을 가능성입니다. 장부 신축 때와 마찬가지로 삼도도괴 역시 실패할 것임을 내다본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민자건의 정치적 경륜은 공자와 자로를 뛰어넘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를 통해 공자가 그를 외제자로 대접한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군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민자건이야말로 수제와 치평을 관통하는 어짊을 실현한 인물이 됩니다. ‘논어’에서 대부 반열에 오르지 못한 그에게 민자(閔子)라는 호칭이 부여된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은 조선 정조의 '화성능행도' 중 야밤에 총포를 동원한 군사훈련을 실시해 노론대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장면을 담은 '서장대 야조도'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