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쪽 섬돌 위에 서있었을까?

10편 향당(鄕黨) 제8장

by 펭소아

고을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는 지팡이 짚는 노인이 먼저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자리를 떴다. 고을 사람들이 역병을 쫓는 굿을 벌일 때는 조복을 갖추고 동쪽 섬돌에 서있었다.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향인음주 장자출 사출의 향인나 조복이립어조계



하늘(天)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 시대정신을 깨닫는 것(知命)입니다. 사람(人)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지름길이 언어를 이해하는 것(知言)입니다. 그렇다면 예를 터득하는 것(地禮)의 본질은 뭘까요? 바로 지상(地)의 척도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영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확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다시 주나라 전체를 뜻하는 천하(天下), 제후국을 말하는 방(邦), 자신이 사는 고을(鄕), 가족(家)으로 범주의 폭을 좁힐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역 공동체로서 고을 차원에서 공자가 실천한 지상의 척도를 보여줍니다.


고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때는 나이 많은 연장자를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했음이 강조됩니다. ‘예기’ 내칙 편을 보면 ‘오십 세가 되면 집안에서, 육십 세는 고을에서, 칠십 세는 나라에서, 팔십 세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五十杖於家. 六十杖於鄕, 七十杖於邦, 八十杖於朝廷)’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연로해져 지팡이를 짚는 것도 법도가 따로 있었던 것이니 고을 행사에서 지팡이를 짚으려면 60세가 넘어야 했습니다. 이를 봤을 때 공자가 그보다 어렸을 때이니 관직에 진출했던 50세 이전의 처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예기’에는 구십 세의 경우도 등장하는데 아주 특별합니다. 만나고 싶으면 천자라도 직접 찾아가야 했고 귀한 선물을 갖고 가야 한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儺)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귀(疫鬼)를 쫓는 무속의례를 말합니다. 나례(儺禮)라고도 하는데 방상시(方相氏)라는 험악한 가면을 쓰고 위협적 동작으로 역귀를 쫓아내는 퍼포먼스가 펼쳐졌습니다. 이 의례가 독립된 춤이 된 것이 나례무(儺禮舞)이고, 연희화한 것이 나희(儺戱)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유행하기 시작한 처용무와 비슷한 전통의 무속의례로 보통 이를 ‘벽사진경(辟邪進慶)’이라고 말합니다. 사특한 것을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합리주의자였던 공자는 귀신보다 사람, 죽음보다 삶에 더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11편 선진 제11장). 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선 침묵하는 방법으로 신비주의를 멀리 했습니다(7편 술이 제20장). 그런 그에게 하늘과 조상에 올리는 제사는 신앙심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구성원의 화합과 조화를 끌어낼 수 있는 ’지상의 척도‘였기에 존중한 것이었습니다.


샤머니즘적 속성이 강한 나례에 대한 생각도 같았습니다. 마을공동체 유지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에 이를 존중하기 위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관복인 조복까지 갖춰 입고 참석한 것입니다. 조복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는 관직에 진출한 50세 이후의 처신으로 보입니다.


제 눈길을 끈 것은 이때 공자가 하필이면 왜 조계(阼階) 위에 서 있었을까 입니다. 조계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동쪽 섬돌을 말합니다. 집안에서 관혼상제의 의례를 치를 때 주인은 이 섬돌 위에 올라가 손님을 맞게 돼 있습니다. 어떤 주석서는 공자가 나례 행사의 사회를 맡았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그보다는 귀신을 쫒는 나례 행렬이 공자의 집 앞을 지나갈 때 혹여 조상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사당 앞을 지키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기’ 교특생(郊特牲) 편을 보면 ‘고을 사람들이 길 제사를 지내면 공자는 조복을 입고 동쪽 계단에 서 계셨으니, 묘실의 신을 편안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을의 예법을 존중하면서도 미신적 행위에 대해선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keyword
펭소아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32
매거진의 이전글멀리 심부름 보낼 때 두 번 절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