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영웅본색을 엿보다

10편 향당(鄕黨) 제3장

by 펭소아

대궐 문을 들어설 때는 마치 문이 낮아 들어갈 수 없어서 그러는 듯 허리를 굽혔다. 서 있을 때는 문 복판을 차지하지 않았고, 다닐 때는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군주의 자리 앞을 지날 때는 낯빛은 싹 바뀌듯, 발걸음은 재촉하듯, 말솜씨는 부족한듯했다.

옷자락을 움켜쥐고 대청에 오를 때는 허리를 굽히고 숨을 죽여서 마치 숨도 쉬지 않는 듯했다. 대청에서 내려갈 때는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낯빛을 풀어 온화한 표정이 됐고. 다 내려와 종종걸음 칠 때는 날개라도 달린 듯했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면 공손하고 삼가는 자세를 취했다.

옥으로 된 홀을 들 때는 마치 그 무게를 감당치 못해서 그러는 듯 허리를 굽혔고, 위로는 이마 높이, 아래로는 가슴높이로 들었으며, 낯빛은 바꿔 잔뜩 긴장한 듯, 발걸음은 좁은 보폭으로 뒤꿈치를 끌 듯 걸었다. 공적 연회에서는 낯빛을 온화하게 풀었고. 사적 만남에서는 더욱 편안해졌다.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立不中門, 行不履閾.

입공문 국궁여야 여불용 입부중문 행불리역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其言似不足者.

과위 색발여야 족확여야 기언사부족자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 似不息者.

섭자승당 국궁여야 병기 사불식자

出降一等, 逞顔色, 怡怡如也, 沒階, 趨進, 翼如也, 復其位, 踧踖如也.

출강일등 령안색 이이여야 몰계 추진 익여야 복기위 축적여야

執圭, 鞠躬如也, 如不勝. 上如揖, 下如授, 勃如戰色, 足蹜蹜如有循.

집규 국궁여야 여불승 상여읍 하여수 발여전색 족축축여유순

享禮, 有容色, 私覿, 愉愉如也.

향례 유용색 사적 유유여야



대궐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할 때 공자의 행동거지가 소개돼 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 비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공자가 2500년 전 절대왕정 시대를 살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군주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차 없이 간하라고 했던 공자였던 만큼 행동거지로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 더욱 신중한 자세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공자가 입문-승당-입실의 비유를 좋아해서인지 대궐문으로 들어서는 입문의 자세부터 소개됐습니다. 대궐문은 엄연히 높고 컸을 터인데 자신의 키를 감당할 수 없기라도 하듯 허리를 굽혀서 들어갔다는 것은 겸손한 자세를 견지했다는 것입니다. 문 한복판에 서있거나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통행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체통을 잃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새기면 될 듯합니다.


다음은 궐내로 들어선 다음입니다. 조회의 장소에는 지정된 제후의 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설사 제후가 없더라도 그 앞을 지날 때는 낯빛과 발걸음을 바꾸고 수다를 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에 대해서 ‘말을 더듬거리듯 했다’라는 풀이가 있는데 정확히는 ‘말솜씨가 부족한 듯했다’가 맞습니다. 말솜씨가 뛰어났음에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안 했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제후가 좌정한 대청으로 올라가 배알 할 때의 행동거지입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혹시 옷자락(齊,옷자락 자)에 걸려 넘어질까 이를 거머쥐고 허리를 굽힌 채 숨소리까지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굴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옷자락을 쥔 것은 계단을 오르다 망신을 사지 않기 위해 조심한 것이고 허리를 굽히는 것은 유교권에선 너무도 당연한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숨직일 필요까지 있을까요? 이 역시 임금 앞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배려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임금을 배알하고 돌아서 대청 아래로 내려올 때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면서 서서히 평소의 표정을 되찾아 마지막에는 날개가 달린 듯 경쾌하게 걷는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절름발이 겁보에서 무시무시한 킬러 카이저 소제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케빈 스페이시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그래 놓고선 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공손한 자세로 돌변했다니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 따로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를 공자의 영웅본색으로 재해석하고 싶습니다. 사실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가 높게 평가한 제후는 극히 드뭅니다. 특히 동시대 제후 중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제후로부터 봉록을 받고 작위를 받아야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무 수행과 예의 실천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심까지는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회를 할 때 짧은 이탈의 순간을 자신의 방식으로 즐긴 것 아닐까요? 공자 역시 제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도가적 삶을 남몰래 꿈꿨음을 보여주는 단초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대부분 주석서는 마지막 두 문장을 별도의 장으로 분류합니다. 규(圭)는 사극에서 임금이 면류관과 면복 차림으로 국가적 의식을 치를 때 두 손으로 쥐는 홀(笏)을 말합니다. 이는 주나라의 천자가 제후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위는 원뿔 모양으로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반듯한 형태로 된 옥기(玉器)를 함께 내린 것에서 유래합니다. 서옥(瑞玉)으로도 불린 이 옥기의 호칭이 규(圭)입니다. 제후가 천자를 배알 하거나 제후들 간의 회맹이 있을 때 이를 들고 갔으며 다른 제후국에 사신을 보낼 때 자신의 대리자라는 뜻으로 이를 대동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두 문장을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공자의 행동거지로 보고 별도의 장으로 구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규는 제후뿐 아니라 그 아래 대부들의 품계를 나타내는 복식의 일부가 됐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대관식 장면을 보면 임금뿐 아니라 신하들도 두 손에 옥이나 나무로 된 홀을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외교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로만 국한하기보다는 대궐에서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로 풀어냄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공자는 실제 외교 사신으로 외국에 파견됐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습니다.


임금이 면류관과 면복을 쓰고 규까지 대동하는 행사는 대관식이나 종묘 제례행사처럼 최고 권위의 국가적 행사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뒤풀이 행사로 임금과 신하가 어울리는 연회도 열리기 마련입니다. 본문의 향례(享禮)를 외교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로만 보지 말고 국가적 행사 뒤의 연회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적(私覿) 역시 상대국 제후나 대부와 비공식적 만남뿐 아니라 자국의 제후나 대신과 사교적 만남으로도 풀 수 있습니다. 공자는 그 3단계의 행사에 맞춰 얼굴 표정과 행동거지 역시 3단계 옵션을 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에게 적용해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공식적인 비즈니스 미팅과 그와 연계된 공식 만찬 그리고 캐주얼한 사교 파티의 옷차림이 다르듯 그에 걸맞은 태도와 표정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옥규.jpg 중국 주나라 때 무덤에서 발굴된 옥으로 된 규(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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