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11장
안연이 소리 내 탄식하며 말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파고들수록 더욱 단단하다. 바라보면 앞에 계셨는데 홀연히 뒤에 가 계시다. 차근차근 사람을 잘 깨우쳐주시니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갈무리하게 해 주신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미 내 재주는 다하였건만 우뚝하니 서계신 곳을 좇으려 해도 따를 수가 없다.”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안연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부자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약아이례 욕파불능 기갈오재 여유소립탁이 수욕종지 말유야기
‘아킬레스 안연과 거북 공자’편(9편 자한 제21장&제20장)에서 언급했듯이 안연은 공자보다 똑똑할지언정 영원히 공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공자가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길은 공자가 죽어 배움을 멈추고 안연이 남은 생애에 이를 따라잡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안연은 스승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장의 발언은 안연이 죽기 얼마 전 그런 운명을 예감하고 남긴 말이라고 상상하면 더 극적으로 다가섭니다. 그래서 원문의 탄(歎)을 감탄이 아니라 한탄으로 번역해 봤습니다. 감탄이라 하면 공자의 영명함에 대한 찬탄이지만 한탄이라고 하면 자신이 공자를 초극할 수 없어 영원히 그 그늘 아래 있게 될 것임에 대한 자각이 함께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주자학자들은 안연이 여기서 말하는 대상을 공자가 아니라 도(道)로 풀어냅니다. 지시대명사 之가 공자가 아니라 도라는 설명입니다. 지나친 추상화입니다. 그보다는 군자학을 내면화한 공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공자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안연이 깨달은 바를 표현한 대목 중에서 먼저 ‘앙지미고, 첨지미견(仰之彌高, 鑽之彌堅)’의 역설법이 눈에 띕니다. 가까이서 우러러보면 볼수록 그 경지가 점점 높아 보이고, 깊숙이 파고들수록 그 내공이 더욱 단단함을 깨닫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는 안연 사후 공자의 학문적 계승자로 평가받은 자하가 공자에 대해 한 말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자의 변신은 무죄’편(19편 자장 제9장)에서 소개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가까이서 접하면 온화하며, 그 말을 들으면 매섭다”는 표현입니다. 멀리서 공자를 봤을 땐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로 느껴졌는데 가까이서 접해보니 의외로 인간미가 넘치더라는 것이 첫 번째 반전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람인 줄로 알았는데 입만 열면 엄청난 내공이 담긴 말씀으로 사람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두 번째 반전입니다.
안연이 말한 ‘앙지미고 첨지미견’도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보통은 멀리서 볼 때 존경스럽던 사람도 가까이서 그 단점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면 존경심이 덜하기 마련인데 공자의 경우는 그 반대라는 말입니다. 또 공자라는 사람에 대해 깊숙이 알면 알수록 그 내공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첨지재전, 홀연재후(瞻之在前, 忽焉在後)’라는 표현에 눈길이 갑니다. 분명 앞에 있는 것을 봤는데 홀연히 뒤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도대체 어떤 상황을 표현한 것일까요?
공자가 밝힌 ‘학이시습(學而時習)’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공자는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면서도 예전에 배운 것을 복습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풀이해 복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것을 깨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깨우침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공자가 가르쳐주는 것만 열심히 따라 배우는 것만으로는 공자의 경지를 넘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박아이문, 약아이례(博我以文, 約我以禮)’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공자 역시 그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6장 옹야 제25장에 등장하는 ‘박학이문, 약지이례(博學以文, 約之以禮)’입니다. 이를 줄인 표현이 ‘박문약례(博文約禮)’입니다. 군자학에서 문덕(文德)과 예치(禮治)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켜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博과 約은 대조적 의미로 쓰였으니 전자가 ‘넓히다’는 뜻이라면 후자는 ‘압축하다, 요약하다’로 봐야 합니다. 하지만 約에는 ‘약속하다’와 ‘묶다’, ‘단속하다’는 뜻도 함축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뜻을 두루 지닌 ‘갈무리하다’로 새겨 봤습니다. 박문약례도 ‘글공부를 통해 식견을 넓히고 예법을 통해 그런 식견을 갈무리하라’로 새겨 봅니다.
마지막으로 ‘욕파불능(欲罷不能)’과 ‘기갈오재(旣竭吾才)’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주석서 중에서 이를 하나로 묶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서 이미 내 재주는 고갈됐다’라는 식으로 새기기도 합니다. 문맥상 欲罷不能은 앞에 붙고, 旣竭吾才는 뒤에 붙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두 표현에는 공통된 감정이 묻어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짙은 좌절감과 열패감입니다.
공자 스스로 자신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던 천하의 기재가 왜 스승에 대한 족탈불급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군자학을 창학한 공자 자신이 멈춰서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깊이를 더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연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군자학을 마스터한다고 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운명’을 면할 수 없다는 씁쓸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를 너무 흠모했기에 그 그늘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의 운명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그의 전체적 발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이야말로 안연의 감동적인 '아모르 파티 선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