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9장
공자가 말했다. “봉황새가 내려오지 않고, 강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네. 나는 끝이로구나.”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자왈 봉조부지 하불출도 오이의부
봉조(鳳鳥)는 봉황을 말합니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부르는 상상의 새입니다. 고대 중국의 전설적 왕인 황제와 요(堯)·순(舜) 그리고 주문왕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태평성세를 여는 성군의 상징이 됐습니다. 훗날 기린, 용, 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이라 하여 신성시되는 새이기도 합니다.
‘강에서 그림이 나온다’는 표현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지칭합니다. 하도는 삼황의 한 명인 복희의 치세 때 황하에서 나온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한 용마의 등에 찍힌 반점으로 형상화된 도안을 말합니다. 네모반듯한 방진 안에 동서남북의 위치에 숫자를 형상화한 흑백 점이 55개 그려진 그림입니다. 낙서는 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 때 낙수에서 나온 신령스러운 거북이(영귀‧靈龜) 등에 그려진 도안을 말합니다. 역시 흑백 점 45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도와 낙서에 찍힌 숫자 원리를 토대로 주역의 원리가 추출됐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봉황이 태평치세를 여는 성군의 상징이라면 하도와 낙서는 문명 질서를 상징합니다. 공자는 자신의 생애에 성군이 출현하지 않고 문명 질서의 청사진이 새로 제시되지 않은 것을 자신의 탓이라고 통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성군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주석서는 이 장의 내용을 성군이 출현하지 않아 자신이 쓰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으로 풀어냅니다. 공자는 결코 그렇게 수동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봉황이 깃들게 하고 하도와 낙서가 출현했다는 평가를 끌어내고자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평생의 노력에도 이를 성취하지 못하자 스스로를 자책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른 역사적 인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기에 가능한 발상입니다.
공자의 통탄은 원래 왕조시대 왕이나 제후에게 어울리는 것입니다. 성군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그에 걸맞은 평가가 나오지 않을 때 “아 결국 나는 성군 감이 아닌가 보구나”라고 통탄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헌제 잠시 하대부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동일한 한탄을 하는 것이니 발칙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를 정면으로 직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군자학을 충효사상으로 둔갑시킨 이들이기에 공자가 감히 왕과 제후와 맞먹으려 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용해주는 성군이 없어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위장술을 펼친 것입니다.
설사 공자가 자신을 성인군자와 동일시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왕조시대에는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당시 주나라 왕이든 아니면 그 아래 그 어떤 제후든 성군의 반열에 들 만한 사람이 없다고 현실정치를 맹비판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왕이나 제후가 성군 감이든 아니든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 후대의 유학자들은 결코 입에 압을 수 없는 발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공자가 이런 발언을 하고도 살아남은 이유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화법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 공자가 살아있는 동안 봉황이나 하도따위가 출현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시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 시체 상태로 발견된 적은 있습니다. 공자는 이를 빌미로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의 집필을 중단했습니다.
그럼 공자가 봉황, 용마, 영귀 같은 상상의 동물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공자가 믿은 것은 그러한 영물에 투영된 민심이었습니다. 태평성대가 열렸다는 민심이 그러한 영물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마련임을 꿰뚫어 봤기에 결코 실재하지 않는 영물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당대의 정치를 비판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군자학을 닦은 사람이라면 군주와 동일한 존재임을 환기시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