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8장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어수룩한 사람이 내게 질문한다 해도 텅텅 비어있어서 나는 다만 질문한 내용의 끝에서 끝까지 두들겨가며 진력을 다해 설명해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자왈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
공자는 당대의 만물박사. 잡학박사로 유명했습니다. 호기심이 생기면 각 분야 전문가를 찾아가 묻고 배우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명실상부한 것을 좋아하는 공자 건만 어떻게 그 자신이 명성과 실상이 다르다고 말하는 걸까요?
주희와 같은 성리학자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라 해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적 반어법(아이러니)을 쓴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은 이유가 아는 것이 없다는 마음자세로 자신을 찾아와 질문하는 사람의 문제를 성심성의껏 풀어줬기 때문이라고 반어법을 써서 고백한 것입니다.
주희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텅텅 비어있을 뿐이다’라는 뜻의 ‘공공여야(空空如也)’를 비부(鄙夫)의 수식어로 봅니다. ‘아무 생각 없는 고루한 사람이 질문해오면’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 표현이 공자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든 게 없는 사람인 줄 모르고 나를 찾아와 질문하는 어수룩한 사람이 있으면’으로 새긴 것입니다. 저는 다산의 독법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 이를 취했습니다.
다산의 독법을 적용하면 이 장의 메시지는 이렇게 풀이됩니다. ‘내가 아는 게 없어 머리가 텅 빈 사람인 줄 모르고 나를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답을 찾아주려고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묻고 따져가며 진력을 다 노력했을 뿐인데 어느새 내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더라.’
다산은 이를 공자의 공부법으로 봤습니다. 누군가 찾아와 질문을 던지면 대충 아는 척하기보다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그 시작과 끝(始末), 본류와 말단(本末), 옳고 그름(正反)을 철저히 따져보는 과정을 거쳐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를 끌어내는 것이 그 공부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연상시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파이 신전의 문구를 자신의 모토로 삼았던 소크라테스는 누군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할 때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 실제론 그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함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제대로 된 앎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 끝에 진리에 도달하게 해 준다 하여 문답법이라고도 하고 여성이 오랜 진통 끝에 아기를 낳듯이 진리를 낳게 해 준다 하여 산파술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문답법과 산파술은 대부분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유리한 화술입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누구나 막히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미워한 이유도 여기에 숨어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라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결국 아테네 시민들이 제대로 아는 게 없으면서 아는 척하는 속물로 전락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달랐습니다. 공자는 ‘군자도 미워하는 게 있느냐’는 자공의 물음에 4가지를 미워한다고 하면서 ‘남의 나쁜 점을 들춰내는 것’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헐뜯는 것’, ‘용감하지만 무례한 것’(17편 양화 제24장)을 포함시켰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발칵 뒤집어진 이유들 속에 당연히 들어갈 만한 내용입니다. 공자는 그 문답법 또는 산파술을 그 자신에게 적용했습니다. 아니면 자신에게 질문을 들고 온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이를 풀어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똑같이 “나는 모르고 또 모를 뿐”이라면서도 그 질문의 화살을 타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반감과 반발을 덜어낸 것입니다.
공자가 주공(희단)의 사당인 태묘에 처음 들었을 때 매사를 묻고 또 물었다는 팔일과 향당 편의 에피소드는 이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래서 “누가 추읍 사람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는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하나하나 질문을 던져 상대의 설명을 청하되 상대가 답하지 못하는 대목이 있을 때 “제가 배운 바로는…”이라며 이를 설명해줘 상대의 승복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곧 예이다”라는 공자의 발언은 소크라테스가 갖추지 못했던 예의 힘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이수태 씨는 ‘고기양단(叩其兩端)’이 양 극단을 배격하고 가운데 것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이 장이 중용(中庸)의 지혜를 소개한 내용이라고 주장합니다. 공자의 발언 중에 과(過)와 불급(不及), 광(狂)과 견(狷)이 바로 양단에 해당하며 그런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지혜를 끌어내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풀어낸 것입니다. 충분히 음미할만 합니다. 하지만 저는 중용의 중을 가운데가 아니라 적중의 의미로 새기기에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문맥상 ‘끝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따져가며’라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