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5장
공자가 광 땅에 있을 때 두려운 일을 당하자 말했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문(文)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하늘이 장차 이 문을 소멸할 거라면 나중에 죽는 사람은 이 문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아직 이 문을 소멸하려 하지 않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자외어광왈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천지장상사문야 후사자부득여어사문야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천지미상사문야 광인기여여하
광(匡)은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땅입니다. 천하주유 시절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남쪽의 진(陣)나라로 가던 도중 이곳을 지나가다가 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포위된 상태에서 닷새나 농성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공자와 외모가 비슷한 양호가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동맹국의 맹주인 진(晉)나라 대신 정나라를 치면서 이곳을 임시 점령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포악한 짓을 많이 벌여 주민들의 극심한 반감을 샀습니다. 당시 양호의 수레를 몰았던 공자의 제자 안각(顔刻)이 공자의 수레를 몰며 길안내를 맡자 안각을 알아본 주민들이 외모가 비슷한 공자가 양호인 줄 알고 징치하겠다고 나서며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 장은 그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공자가 한 발언입니다. 원문의 외(畏)는 ‘두려워한다’는 뜻인데 여기선 ‘포위되다’나 ‘경계하다’로 의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두려운 일을 당했다’로 새기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낯선 땅에서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제자들이 불안해하자 공자가 “내가 이런 곳에서 개죽음할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한 말입니다.
그 발언은 3단 논법으로 전개됩니다. 첫째 자신이 주나라 문왕에서 시작된 문(文)의 정통 계승자라고 천명합니다. 둘째 만일 그 문이 소멸된다면 후대 사람들은 이 문과 함께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엔 그 문의 전통은 하늘이 내린 것인데 하늘이 과연 이를 두고만 보고 있겠느냐는 암시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셋째 따라서 그 문의 정통 계승자인 자신을 하늘이 보우할 터이니 광 땅 사람들이 자신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럼 공자가 여기서 말하는 문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글월이나 서책에 담긴 콘텐츠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고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어 빛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군사력인 무(武)나 경제력인 부(富)와 같은 물리적 힘을 쓰지 않으면서 정신력과 도덕의 힘으로 상대를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문왕이 기초한 주나라의 제도와 문명질서를 뜻합니다. 그 문명질서에 입각한 정치가 곧 예치(禮治)입니다.
‘논어’에서는 이를 문(文), 문덕(文德), 사문(斯文)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공자의 정신 내지 가르침을 이 3가지 표현으로 담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단적 유학자를 겨냥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비판하는 표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공자가 ‘이 문’이라 말한 가치를 어지럽히는 도둑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사문은 후대 맹자나 동중서, 주자에 의해 편집되고 왜곡된 교조적 유학의 배타적 그것과 다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소프트파워로 상대를 감화시키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문의 후사자(後死者)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나중에 죽는 자라는 뜻인데 문왕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 사람 전체를 지칭한다는 설과 공자 자신을 지칭한다는 설이 엇갈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공자가 죽어버릴 경우 그 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하니 공자 이후의 후속세대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당시 공자가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응해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는 지명(知命) 의식이 뚜렷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명을 자신이 이룩해낼 것이란 자신감과 확신에 가득 찬 공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의 공자 나이가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사명이 뭔지를 안다는 지천명(쉰)을 훌쩍 넘어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이순(예순) 안팎의 나이였을 터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과 10년 뒤 공자에게선 이런 위풍당당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문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해내 후속세대가 사문을 만끽하게 해 주리라는 꿈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정치에선 실패했지만 제자들을 통해 그 가르침이 면면히 전해지도록 했다는 점에서 공자의 지명은 불멸의 가치를 획득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맞을 무렵의 공자는 깊은 좌절과 짙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니 설사 우리 생이 실패작이라고 느껴지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이 옳고도 아름답다면 설사 우리는 잊히더라도 후사자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