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3장
공자가 말했다. “삼베로 짠 관을 쓰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실로 짠 관을 쓴다. 이는 검소한 것이니 나는 대다수 사람을 따르겠다.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대청 위에서만 한다. 이는 교만한 것이니 대다수 사람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을 따르겠다.”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자왈 마면 예야 금야순 검 오종중 배하 예야 금배호상 태야 수위중 오종하
공자가 예(禮)를 중시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상의 척도이자 문명의 징표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형식보다 내용을 강조했으니 예의 바탕이 되는 정신 또는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래의 예법이라 해서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겁니다. 앞서 살펴본 사절(四絶) 중에서 무필(毋必)의 자세를 예에도 적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 삼베(麻)로 촘촘하게 짠 관을 쓰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실(純)로 짠 관을 쓰는 경우가 늘자 검소한 것이기에 이를 존중하고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純을 ‘검은 비단 치’로 새기는 경우도 있는데 비단은 삼베보다도 비싸기에 ‘실 순’으로 새기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또 예법에는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 먼저 일배(一拜)하고 대청 위로 올라가 재배(再拜)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가 되면서 대청 위에 올라가 일배만 하는 것으로 간소화된 듯합니다. 공자가 볼 때 이는 실로 짠 관을 쓰는 것과 달리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검소함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 수고를 피하려는 간사한 마음이 작동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공경하는 마음만 있다면 굳이 두 번 절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한번 절해도 될 것을 굳이 두 번 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번문욕례(繁文縟禮)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해석입니다. 공자의 발언에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더 날카롭게 작동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나라에선 제후보다 대대로 삼공(三公)의 지위를 독점해온 삼환 세력의 위세가 더 막강했습니다. 임금에게 두 번 절하게 한 것은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한 번밖에 절을 받지 못하는 고관대작과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제후에게 두 번 절하는 의무까지 없애버리면 조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삼환에게 한 번 절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집니다. 따라서 이는 주나라 종법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니 예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희와 같은 송유는 이런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예의 근본은 사치한 것이 아니라 검소한 것이라는 식의 맥 빠지는 해석만 내놓고 맙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공자의 준열한 비판정신은 사라지고 무엇이 예에 부합하고 무엇이 예에 부합하지 않느냐는 공리공론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썩어빠진 의식 조선시대로 넘어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 따위를 두고 예송(禮訟) 논쟁으로 이어졌으니 저승에 있던 공자가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