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태백(泰伯) 제21장
공자가 말했다. “우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소박하게 먹고 마시면서 선조에게는 효성을 다했고, 조악하게 입고 다니다가도 제사 때 입는 예복과 예모는 아름다움을 다했고, 자신의 거처는 누추하게 하면서도 논밭의 수로를 놓는데 진력을 다했다. 우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子曰: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자왈 우 오무간연의 비음식이치효호귀신 악의복이치미호불면 비궁실이진력호구혁. 우 오무간연의
태백 편에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성군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많이 등장합니다. 요순 다음으로 유명한 전설상의 임금 우(禹)도 그중의 한 명입니다. 이들 세 임금은 핏줄이 아니라 공덕(功德)이 높은 사람에게 선양(禪讓)했다는 전설의 3인방입니다.
그 전설을 비교해보면 요(堯)는 천문과 역법을 통해 농사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니 도(道)를 터득한 군주였습니다. 순(舜)은 효행의 화신이었으니 덕(德)의 실현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는 치수(治水)의 화신이었습니다. 치수를 하려면 자연의 이치인 도와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덕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요순을 능가한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공자 이전에는 요순보다 우가 더 유명했습니다. 요순은 전설적 존재인 삼황오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인 반면 우는 하은주(夏殷周)라는 역사시대를 연 첫 군주이기 때문입니다.
‘사기’에 따르면 우의 성은 사(姒)이고 이름은 문명(文命)입니다. 우의 아버지 곤(鯀)은 요임금 시절 치수를 맡아 9년 동안 애를 썼음에도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는 법만 알았지 물길을 트는 법을 몰라 수해를 더 키운 탓에 결국 순임금 때 처형됩니다.
순은 그리고는 다시 곤의 아들인 우에게 치수의 임무를 맡깁니다. 우는 아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합니다. 물길을 파서 황하의 물을 여러 갈래로 나눴고, 수리시설을 많이 축조해 황하의 물을 끌어다 농지에 댑니다. 이를 위해 불철주야 일하느라 13년 동안 3번이나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집에 들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우의 이런 공로로 중국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에서 부족 연맹 차원을 넘어선 고대국가가 출현하니 바로 하(夏)나라입니다. 멸사봉공에 가까운 헌신을 해서인지 요의 재위 기간이 70년, 순의 재위 기간이 48년이었던 것에 비해 우는 재위 8년 만에 숨을 거둡니다. 그 역시 요와 순처럼 익(益)에게 선양했지만 익이 사양의 뜻으로 기산에 몸을 숨기자 신하들이 바로 우의 아들인 계(사계‧姒啓)를 왕위에 추대했고 이후 그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간 것이 곧 하왕조입니다.
사실 ‘시경’에는 요순이 등장하지 않지만 우에 대한 찬사가 담긴 시는 2편이나 나옵니다. 요순에 대한 찬미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경’과 공자의 어록인 ‘논어’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묵자’와 ‘맹자’, ‘사기’로 이어지면서 요순이 성군의 대명사가 됩니다. 요순은 선양을 완성한 반면 우는 결과적으로 선양에 실패했기에 같은 반열에 오르지 못합니다.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易中天)은 공자가 자신의 이상정치론을 옹호하기 위해 역사기록 구석에 처박혀 있던 요순을 끌어오면서 핏빛 찬탈의 기록을 장밋빛 선양의 미담으로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진실의 일말이 담긴 통찰입니다.
하지만 이중톈이 생각하듯 봉건 질서를 미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혈통에 의해 왕과 공경대부의 지위가 결정되는 봉건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종전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불분명하고 의심스러운 기록을 한껏 증폭한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군자가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수양과 학문연마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군자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왕위의 부자 승계를 거부한 요순의 사례를 극적으로 부각한 것입니다.
그런 공자로 인해 현실에선 너무나 당연시됐던 왕위의 부자 승계가 정통성이 떨어지는 계면쩍은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었음을 후대의 유학자들은 물론 현대의 이중톈조차 보지 못한 것입니다.
공자가 이렇듯 요순을 부각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에 대한 평가절하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업적만 놓고 보면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우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빛이 바래진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그에 대한 공자의 무의식적 죄의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요순과 비교했을 때 우의 부족한 점을 찾으려고 했지만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자복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왜 요순에 대해선 흠을 찾는 간(間)을 하지 않으면서 우에 대해서만 간을 한 걸까요? 공자의 시대 우는 이미 위대한 왕의 반열에 올라 이미 대우(大禹)로 불리고 있었지만 요는 도당(陶唐)씨. 순은 우순(虞舜)씨로 그 출신지를 딴 이름으로만 불리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군자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요가 도(道), 순이 덕(德)을 대표한다면 우야말로 그 둘을 겸비한 인(仁)의 화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고 논밭이 물에 잠겨 두려움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노심초사하며 멸사봉공하는 삶을 살았으니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어짊의 진정한 실천가입니다. 거기에 요의 검소함과 순의 효성까지 갖췄으니 우야먈로 성군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자가 봉건제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상 그 봉건제를 전복하기 위해 요순을 택한 도덕 혁명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정치적 결단이기도 한 그런 선택으로 인해 군자학의 진정한 역할모델이 되어야할 우를 버리고 요순을 택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공자가 추구한 도덕혁명은 남다른 공평무사함을 추구했음에도 정치적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것이기도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