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왜 차분하고 너그러운가

7편 술이(述而) 제36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평온하고 관대하지만 소인은 늘 초조하고 걱정한다.”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자왈 군자탄탕탕 소인장척척



원문의 탄(坦)은 평탄하다, 평온하다, 너그럽다는 뜻을 집니다. 탕(蕩)은 단독으로 쓰이면 쓸어버리다나 방탕하다는 부정적 뜻도 있지만 탕탕(蕩蕩)으로 쓰일 때는 넓고 광대하다, 관대하다는 긍정적 뜻을 갖습니다. 장(長)은 여기서는 항상, 늘이라는 부사어 상(常)과 같은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척(戚)은 가깝다와 근심하다, 슬퍼하다 등의 여러 뜻을 갖는데 여기서는 근심하다, 걱정하다가 적절해 보입니다.


군자와 소인이 대비됩니다. 하지만 그 둘을 선악과 호오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군자가 탁월한 소수인 것은 맞지만 소인은 열등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다수, 곧 보통사람을 말한다고 풀어내는 것이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21세기 상황에 부합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은 늘 불안하고 근심 걱정에 시달립니다. 예전에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편안할 날이 없어서 그랬다면 오늘날에는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현실이 그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그러합니다. 이러다 대학 못 가는 거 아니야? 취업 못하는 거 아니야? 결혼 못하는 거 아니야? 출세 못하는 거 아니야? 평생 이런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다 자식이라도 낳게 되면 여기에 자식 걱정까지 더해집니다.


공자는 그런 소인의 삶을 비하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못난 졸장부의 삶이 아니라 대다수 보통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송대 이후의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사대부들이 계급의식이 투철해지면서 보통사람들의 삶을 비하하고 경멸하는 바람에 생긴 오해입니다. 민주주의로 만민평등과 국민주권이 일반화한 현대와 맞지 않는 고루하고 편벽된 사유방식입니다. 오늘날을 보통사람의 시대라 한다면 공자의 표현을 빌릴 경우엔 ‘소인의 시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의 시대에도 사람들을 이끌고 갈 리더는 필요합니다. 민주주의 시대에도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리더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80대 20의 사회’라 할 때 20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소수입니다. 군자가 바로 그러한 리더가 될 사람입니다.


군자의 비범함은 평범한 소인이 느끼는 초조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군자학은 그를 위해 2가지에 대한 통합적 이해와 통달을 강조합니다. 객관적 세계의 이치를 터득하는 치평의 도와 대다수 소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수제의 덕입니다. 현대적 용어로 쉽게 표현하면 치평의 도는 사이언스(science)요, 수제의 덕은 휴머니티(humanity)입니다.


객관적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는 하는 사이언스를 터득하면 천둥번개가 치면 하늘이 노한 것이라거나 죽으면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걱정에서 자유롭기에 차분합니다. 마찬가지로 훗날 맹자가 말한 칠정(七情)에 얽매인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나기에 평온합니다. 바로 탄(坦)의 경지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인의 불안을 잠재워주려면 소인의 마음을 읽고 보듬어줄 줄도 알아야 하니 휴머니티를 함께 갖춰야 합니다. 휴머니티가 풍부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그래서 너그럽기 마련입니다. 바로 탕탕(蕩蕩)의 경지입니다.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바로 이러한 경지를 노래한 시가 실려 있습니다. 바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입니다. 사바세계를 구원하러 대승의 길을 걷는 보살의 삶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진흙탕 같은 현실정치에 뛰어드는 군자의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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