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술이(述而) 제30장
진(陳)나라의 사패가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의 소공은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예를 알았습니다.”
공자가 물러나자 사패가 무마기에게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 불러 말했다. “나는 군자는 편당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당하는가? 노나라의 소공은 오나라 공실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성이 같아서 부인을 오맹자라 부른다. 소공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무마기가 이를 고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아는구나.”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진사패문 소공지례호 공자왈 지례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 爲同姓, 謂之吳孟子.
공자퇴 읍무마기이진지왈 오문군자불당 군자역당호 군취어오 위동성 위지오맹자
君而知禮, 孰不知禮?“
군이지례 숙불지례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무마기이고 자왈 구야행 구유과 인필지지
진(陳)나라의 사패(司敗)는 노나라의 사구(司寇)에 해당하는 벼슬명이니 재판과 법집행을 담당한 법무장관에 해당합니다. 공자도 노나라 제후 직할령의 사구 벼슬을 지낸 바 있으니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법가가 등장하기 전에는 예가 법까지 아울렀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무마기(巫馬期)는 공자의 제자로 ‘논어’에선 이 장에만 등장합니다. 무마(巫馬)가 성이고 이름은 시(施), 자가 자기(子期)로 노나라의 단보(单父)의 읍재를 지냈다고 합니다. ‘공자가어’는 그가 진나라 출신이라고 밝혔는데 진나라 사패가 가까이 불러 속내를 보였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한나라 때 편집된 ‘한시외전’에 자로와 무자기가 나무를 하다가 엄청나게 부유한 집안의 호화로운 행차를 목격하고 나눈 대화가 전해집니다. 자로가 “스승님께 배운 학문과 품성, 재주를 포기할 경우 저렇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무마기는 “뜻있는 선비라면 이익 앞에서 스스로를 망각하는(見利亡身)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를 보면 무마기는 자로와 연배 차이가 크지 않은 제 계열의 제자이며 매우 올곧은 사람으로 짐작됩니다.
노소공(희조 또는 희주)은 공자가 출사하기 전의 노나라 제후로 삼환 제거에 나섰다가 망명길에 나서야 했고 결국 시체가 돼서야 노나라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동생으로 노소공 사후 삼환에 의해 제후로 추대된 노정공(희송) 시대 공자의 공직 진출과 퇴임 그리고 천하주유가 시작됩니다. 공자가 천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때 제후는 노정공의 아들인 노애공(희장)이었습니다. 이 장의 내용은 공자가 천하주유를 하다 진나라에 체류하던 시기 일어났을 공산이 크니 노애공 시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나라는 주공(희단)의 후손에게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오나라의 시조는 주문왕의 삼촌인 태백과 중옹이니 역시 같은 희(姬)성을 썼습니다. 노나라와 오나라가 동성동본의 나라이니 그 공실 사람은 서로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이 예입니다. 하지만 노나라는 당시 남방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오나라와 전략적 제휴를 위해 동성불혼의 원칙을 깨 가며 오나라 공실의 여인을 노소공의 아내로 맞는 정략결혼을 단행했습니다.
다른 나라로 시집온 공실 여인의 호칭은 본국명과 성씨를 합쳐서 부릅니다. 제후의 성이 강(康)인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시집온 여인을 제강(齊康)으로 부르는 식입니다. 따라서 노소공의 부인은 오희(吳姬)라는 호칭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임을 감추기 위해 오맹자(吳孟子)라는 호칭을 썼으니 맹자(孟子)라 한 것은 그녀가 맏딸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진사패는 이런 맥락을 짚으며 공자를 비판한 것입니다. 공자로선 반박하기 어려운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공자의 대응에 대해 주희는 “군주의 허물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어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직접 자신의 입으로 군주의 허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라고 상찬했습니다. 신하로서의 도리도 지키면서 군자로서 양심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노소공은 제후들 중에선 예에 대해 정통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사패의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는 바대로 답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복선이 깔려 있음을 뒤늦게 전해 듣고는 비로소 허를 찔렸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공자가 설파하는 군자학을 토대로 공자가 군자부당(君子不黨)을 실천하지 않았으니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기 위한 함정이었음을 뒤늦게 파악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모양이 더 우스워집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물탄개과(勿憚改過)의 초식으로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입니다.
공자의 발언을 보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맹자의 사례를 몰랐거나 모른 척한 것이 아닙니다. 노소공이 동성불혼의 원칙을 위반했고 따라서 예를 안다고 한 자신의 발언이 잘못된 것임을 깨끗이 승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공자가 군주에 대한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충신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군주에 대한 의리보다 군자로서 양심에 더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공자에게 충(忠)은 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완결성임을 재확인시켜줍니다.
*사진은 마틴 루터가 가톨릭 교회의 파문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양심의 자유가 허락하지 않기에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그린 독일화가 안톤 폰 베르너의 '보름스 제국회의의 마틴 루터'(1877)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