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술이(述而) 제27장
공자가 말했다. “대체 알지도 못하면서 꾸며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많이 듣고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많이 보고 마음에 새겨두니 앎은 그다음이다.”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자왈 개유부지이작지자 아무시야 다문택기선자이종지 다견이지지 지지차야
안다는 것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장입니다. 다문(多聞)과 다견(多見)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많이 듣는 것과 많이 보는 것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논어’의 용법을 보면 다문이 독서와 배움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면 다견은 자신이 몸으로 부딪혀보는 직접 경험을 뜻하는 듯합니다.
간접 경험일 경우엔 여럿을 비교해보고 그중에 좋은 것을 선택해 갈무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반면 직접 경험일 경우엔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지(識)가 중요합니다. 견(見)이라는 한자에는 본디 자연의 움직임을 몸에 옮겨서 취한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識라는 표현에는 이를 더욱 강조하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이 장의 해석에는 3편 술이 제1장에 나오는 ‘있는 그대로 진술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의 술이부작(述而不作)과 16편 계씨 제9장의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것이 버금”을 끌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유불급의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지어내는 것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으로 일상에서 많이 보는 경우로 술이부작과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원문 마지막의 지지차야(知之次也)의 해석을 위해 계씨 편 제9장 내용까지 끌고 와 ‘나면서 아는 것 다음이다’로 새기는 것은 옹색합니다. 저는 차(次)를 시간적 순서 상 다음으로 새겨 다문과 다견을 거친 뒤 비로소 앎이 이뤄진다로 새겼습니다.
제 경험상 누구에게 듣거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으로 안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그런 1차적 인지 다음의 단계로 그것을 숙성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익힌다는 뜻의 습(習)의 단계입니다. 다문의 경우엔 좋은 것을 걸러내 따르는 것이요, 다견의 경우엔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그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는 것입니다. 이런 앎의 1~3단계를 모두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다’라고 할 수 있으니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은 금방 들통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