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술이(述而) 제11장
공자가 말했다. “부가 추구할만한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사인의 일지라도 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추구할만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자왈 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 여불가구 종오소호
원문 그대로를 해석하면 부가 추구할만한 것인지 아닌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공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부가 추구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좋아하는 것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공자가 좋아하는 것이란 뭘까요? 공자가 그토록 놀래 불렀던 호학(好學)이니 배움을 추구하는 삶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중세의 도덕주의자였던 주자학자들은 이런 열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귀는 하늘이 주는 것이니 어차피 추구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들어갑니다. 그건 결코 공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공자는 분명 부가 추구할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괄호 안에 넣어뒀습니다. 다만 그 자신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을 뿐입니다.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부유함은 대다수 사람이 추구하는 바이며 또한 노력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자수성가로 부자가 된 경우도 많이 봅니다. 반면 2500여 년 전 공자 시대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공경대부의 반열에 오른 대인(大人)에게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외라면 그들과 결탁한 소수의 상인 정도였습니다. 조나라 출신 장사꾼으로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를 후원해 왕위에 올림으로써 진나라 승상의 자리를 꿰찬 여불위가 대표적이죠,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주자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부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공자가 어떤 사람인가요? 대인의 지위를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능력과 덕을 갖춘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군자학을 개창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부 역시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마땅히 그에 걸맞게 노력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 부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선 개인적 회의가 강했습니다. 공자의 집안은 대부를 모시고 전쟁터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 전차를 몰거나 지휘하는 사인(士人) 계층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채찍을 잡는 사인의 일’이란 주자학자들의 주장처럼 천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신분에 걸맞은 일을 말합니다. 부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본연의 신분에 맞는 일에 충실했을 것이란 뜻입니다.
공자는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고대의 문헌과 역사를 알아야 하는 유(儒)와 사(史) 그래서 먼 훗날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문인(文人)으로 포장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여불위처럼 최강대국의 승상의 자리에 오르는 벼락출세를 한 건 아니지만 그 덕에 대부의 지위에 올랐고 중국 도처에서 몰려온 수천의 제자를 거느렸고 사후엔 여불위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존재로 추앙받게 됐습니다.
성리학자들의 문제는 세상은 모두 공자 같은 사람으로 차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자는 그런 일원주의자가 아니라 다원주의자였습니다. 부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나름의 길이 있고 자신처럼 그것 말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또 나름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부귀영화는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인데 그 첫머리에 오르는 것이 부입니다. 그만큼 부에 대한 욕망은 강렬한 것입니다. 공자는 이런 통념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 경우에는”이라며 자신의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혹여 부를 추구하는 삶보다 내면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픈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의 선택도 나쁘지 않아”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가에서 열다섯의 나이를 ‘지학(志學)’이라 부릅니다.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열다섯의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五十有五而志于學)는 표현(2편 ‘위정’ 제4장)에서 기원합니다. 이 장과 연결시켜 말하면 열다섯에 부가 추구할만하다 생각하지 않아 가업을 잇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뜻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생을 그에 바쳤고 비록 치국평천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세상의 천대를 받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사후의 재평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재에 밝은 사람은 부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좇아 큰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자처럼 학문이나 정치에 뜻을 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예능이나 스포츠에 뜻을 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뜻이 있다면 길이 생기고 그 길을 계속 걷다 보면 큰돈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만큼의 돈이 따르는 경우를 무수히 많이 봅니다. 반면 이재에 밝지도 않은 사람이 오로지 부만 좇다 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자의 발언은 “나처럼 살아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어찌 모든 사람이 학문에 뜻을 주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다 추구하는 부를 추구하기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삶도 나쁘지 않지 않느냐는 말을 건넨 것입니다. 부는 하늘이 주는 것이란 황당한 소리는 더욱더 아닙니다. 부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을 산다면 왜 그 또한 이루지 못하겠느냐고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택하는 부자 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를 것인지 뜻을 세우고 살라는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