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술이(述而) 제8장
공자가 말했다. “답답해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터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여줬을 때 남은 세 귀퉁이를 들어 반응하지 않으면 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자왈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불이삼우반 즉불부야
공자의 교육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의 상태에 단비를 내려주 듯,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안에서 쪼아댈 때 밖에 암탉이 함께 쪼아주듯 그렇게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소리입니다. 훗날 선불교에서 말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정답을 다 알려주기보다는 일단을 일깨워줌으로써 나머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분(憤)은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분출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비(悱)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啓)와 발(發)은 막힌 걸 열어주고 터준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궁리를 거듭해도 답을 구하지 못해 끙끙거릴 때 생각의 단초를 열어주고, 뭔가를 터득했지만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지 못할 때 표현의 물꼬를 터주는 것을 스승의 역할로 봤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 주도 학습에 방점을 찍은 교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주입식으로 가르치기보다 제자가 목마르기를 기다려 우물가로 찾아왔을 때 마중물만 부어주고 물 긷는 것은 스스로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때 새로운 인식의 지평 전체를 펼쳐 보이기보다는 그 일단만 보여줌으로써 나머지는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만 보여준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비의성(esotericism)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통 이런 비의성은 그 학문의 성격이 둘 중 하나일 때 채택됩니다. 첫째 도가의 가르침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심오함을 갖췄을 때입니다. 하지만 출세간을 지향한 도가와 달리 입세간을 표방한 유가의 가르침은 번문욕례라고 비난받을지언정 언설로 담기 어려운 심오함을 추구하진 않습니다.
둘째는 잘못 이해될 경우 학단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당시 너무도 당연시되던 혈통에 의한 통치에 반대하고 학문과 수양을 통해 도와 덕을 갖춘 지도자만 인정하려 한 군자학의 실체가 드러날 경우 공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네 모퉁이 중 한 귀퉁이만 보여주는 비밀스러운 전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한나라 이후 유학자들은 이런 군자학의 혁명성에 재갈을 물리고 기득권을 수호하는 충효의 사상으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군자학의 진가가 퇴색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