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술이(述而) 제5장
공자가 말했다. “심하도다. 내 노쇠함이여! 오래구나. 꿈속에서 주공을 다시 못 뵌 지가!”
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
자왈 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공
아마 공자가 14년에 걸친 천하주유를 마칠 무렵의 발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이 오십에 출사해 자신이 창학한 군자학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20년 가까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되지 회한에 정저 내뱉은 말이지 않나 싶습니다.
주공(희단)은 공자가 창학한 군자학의 역할 모델이었습니다. 주문왕(희창)의 넷째 아들이자 주무왕(희발)의 둘째 동생이었던 그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세움에 있어 태공 망(강태공)과 더불어 최대 공신으로 꼽힙니다. 종법제와 봉건제 같은 주나라 예악의 핵심이 그에 의해 설계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형인 주무왕이 천하를 제패한 뒤 3년 만에 숨지고 그 아들인 성왕(희송)이 열두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형제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고 사실상 주나라의 재통일을 이끌어냈습니다. 그가 주나라가 천하제패 후 양대 공신으로 사촌동생인 소공(희석)과 함께 꼽히는 이유입니다.
예악에 대한 공자의 공부는 이런 주공이 남긴 예악에 대한 공부에서 시작해 요순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군자학을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다시 말해 군자학은 주공에서 출발해 요순에서 완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공은 왕이 될 수 있었으나 도와 덕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를 포기한 사람이라면 요순은 왕이 됐지만 그 왕좌를 도와 덕을 갖춘 제삼자에게 물려준 사람입니다. 따라서 군자학의 입구가 주공이라면 출구는 요순이 되는 셈입니다.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여전히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존중하는 기풍이 남아있었습니다. 훗날 존왕양이(尊王攘夷)로 표출된 정서입니다. 공자가 군자학을 펼치면서 주나라 예악의 창시자인 주공을 앞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공에게 봉분된 나라가 공자의 모국 노나라인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주공이 설계한 예악에 정통한 자신이 다시 주 왕실 중심의 고대의 질서를 회복시키겠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공자가 복고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오해가 생겼습니다.
공자가 주공에게서 군자학의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예악을 중시하고 무력이 아니라 문덕에 의한 통치를 앞세운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미래지향적 군자학을 고전적 성인인 주공에게 투사했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이 제환공과 진문공으로 대표되는 전성기의 주나라 중심 질서로 회귀였기에 그에 부응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꿈에서 만난 주공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미래지향적 새로운 질서의 창안자라는 점에서 ‘백마 타고 올 초인’에 더 가깝습니다. 주공이 창안한 종법제와 봉건제는 왕과 그 혈육으로 이뤄진 종실 중심이자 장자 중심의 통치체계입니다. 주공은 철저히 왕실과 공실의 혈통을 지닌 자만이 군자의 자격이 있다고 봤습니다. 반면 공자가 구상한 군자학은 핏줄이 아니라 능력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군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혈통이 아니라 실력 중심으로 질서 재편을 도모한 것입니다.
따라서 꿈속의 주공은 결코 역사적 인물로서 주공이 아닙니다. 공자의 군자학에 입각해 재창조된 주공이며 새로운 천하 질서를 설계해 ‘제2의 주공’이 되겠다는 공자의 야망이 투영된 주공입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공자의 자아이상(Ich-ideal)입니다. 그런 주공이 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제2의 주공’이 되겠다는 공자의 자아이상이 실현 불가능해졌음을 자인한 것입니다. 말년의 공자가 느낀 좌절감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탄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은 프로이트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인 에골 실레의 그림 ‘자아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