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옹야(雍也) 제24장
공자가 말했다. “제나라가 한 번 변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에 이른다.”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자왈 제일변 지어로 노일변 지어도
주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세 때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인물이니 둘이었으니 태공 강상(여상)과 주공 희단이었습니다. 태공이 군사전략의 귀재였다면 주공은 정치력과 외교력으로 그를 뒷받침했습니다. ‘논어’의 표현을 빌리면 태공이 정벌(征伐)의 선봉에 섰다면 주공은 예악(禮樂)의 창제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천하를 차지한 주무왕이 그 논공행상으로 170여개 제후국을 봉분할 때 승상인 태공에게 준 나라가 제나라였고 동생인 주공에게 다스리게 한 나라가 노나라였습니다.
두 나라는 현재의 산둥반도 북쪽에 제나, 남쪽에 노나라가 위치했습니다. 처음엔 국력이 엇비슷했을 것이나 춘추전국시대 내내 제나라는 노나라를 압도하는 강대국으로 군림합니다. 춘추오패의 첫머리를 장식했고 전국시대 7대 강대국인 칠웅(七雄)의 하나로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룰 때 최후로 무너뜨린 나라가 제나라였습니다.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해 그 수도 임치는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불렸습니다.
반면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제와 문물의 기초를 만든 주공의 사상을 계승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일찍부터 군주보다 신하의 힘이 더 커져버린 탓에 내부단결을 이루지 못해 북으로는 제와 진(晋), 남으로 오와 월의 눈치만 보다가 결국 남방 최강국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제나라가 멸망당하기 30여 년 전입니다.
국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나라는 제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 공자는 왜 노나라가 제나라보다 도에 더 가까운 나라라고 주장한 것일까요? 제나라는 잇속 챙기기 바쁜 장사꾼의 나라이자 제환공이래 패도를 추구하는 나라가 된 반면 노나라는 고대로부터 이어온 주공의 법제를 존중해 예치를 추구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주희는 주장했습니다. 사농공상의 중세적 계급질서에 입각한 해석입니다.
그보다는 3가지 정도를 감안한 발언 아닐까 합니다. 먼저 제나라의 경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일변하기가 힘든 나라가 됐지만 노나라는 그보다는 단순한 권력구조를 갖고 있었기에 일변하기 쉽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나라의 권력이 제후에서 대부로 넘어가는 속도가 노나라에 비해 제나라가 급속함을 지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나라의 경우 실권이 진작 제후를 떠나 대부의 손에 들어가 삼환정치의 병폐가 오래됐으나 대부가 제후를 직접 시해하고 전권을 장악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반면 제나라에선 대부의 가문인 전씨 문중이 급속도로 정권을 장악하더니 공자 말년엔 제간공(강임)을 시해하고 공자 사후 100년 만에 권좌까지 찬탈합니다.
마지막으로 ‘무도(無道)와 유도(有道)’편에서 살펴봤듯이 당대의 도전에 응전할 제도적 프로그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도에 가까운 나라 여부가 결정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노나라의 경우 주공의 예악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군자학을 제창하고 나온 '공자 보유국'이란 점에서 도에 더 가깝다고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겸손한 공자가 직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만큼 자신이 창학한 군자학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노나라가 유도국(有道國)에 더 가깝다고 자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농담처럼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 산둥성의 약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각 성은 한 글자로 된 한자 약칭을 씁니다. 주로 고대부터 내려오는 지역 명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산둥성의 대부분은 제나라 영토였음에도 산둥성의 약칭은 齊가 아니라 魯입니다. 제나라가 강태공과 제환공, 관중 같은 천하 영웅을 제아무리 많이 배출했다 해도 노나라에서 하대부에 머물렀던 공자 한 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부심 넘치는 공자의 발언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