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옹야(雍也) 제15장
공자가 말했다. “맹지반은 자랑하지를 않았다. 패주해 후퇴하게 되자 뒤에 처져 후미를 지켜다가 성문에 들어설 무렵 말을 채찍질 하며 ‘용감해서 뒤처진 게 아니라 말이 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子曰: “孟之反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자왈 맹지반불벌 분이전 장입문 책기마왈 비감후야 마부진야
맹지반은 노나라 삼환가문 중 맹손 씨 가문의 일원입니다. 이름은 지측(之側)이고, 지반은 자로 보입니다. 그는 ‘논어’와 ‘춘추’에 각 한 번씩 동일한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노애공 11년(기원전 48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해 노나라 도성 곡부에서 공방전이 벌어졌을 때입니다.
이 전투는 공자의 귀향 프로젝트를 위해 계강자의 가재로 파견된 영유와 그의 막료였던 번지가 무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춘추’를 보면 염유는 노나라 좌군을 지휘하고 번지가 그 아래서 용맹하게 싸워 적군 80명의 수급을 노획하며 승전합니다.
그때 맹유자(맹무백)가 통솔하던 우군은 전투의지가 없어 싸우는 둥 마는 둥 하다 도성 안으로 후퇴합니다. 이때 맹지반이 후미를 지키다 화살을 맞자 그를 뽑아 말채찍으로 삼으며 “말이 가지 않는구나”라고 통탄합니다. 이어 그를 따르던 노나라 병사들이 말을 버리고 뛰어 달아나다가 몰살당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춘추’의 기록만 보면 염유가 이끄는 좌군과 맹유자가 이끄는 우군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맹지반의 사연도 맹유자가 이끌던 우군의 우왕좌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의 나라로 보입니다. 하지만 ‘논어’에서 공자의 발언을 통해 맹지반이 우군을 끝까지 보호하면서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 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패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싸운 사람은 용감하다 칭찬받기 마련입니다. 이 경우 먼저 달아난 사람은 겁쟁이가 되고 맙니다. 맹지반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면 주군인 맹유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겁쟁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을 알았기에 말 핑계를 둘러 댄 것입니다. 그도 대단하지만 이를 꿰뚫어 보고 ‘춘추’의 기록만으로 부족하다 여겨 '논어'에 기록된 발언으로 후대에 귀감으로 삼은 공자의 안목 또한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주역’ 계사전에서 겸(謙)괘에 대한 공자의 발언이 맹지반의 사례와 연관돼 설명되곤 합니다. “애쓰고도 겸손함을 견지하는 군자는 길하다(勞謙君子有終吉).” 공자는 이를 다시 풀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애쓰고도 자랑하지 않고(勞而不伐), 공이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으면(有功而不德) 두터움이 지극한 것이다. 공을 세우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것(下人)을 말한다. 덕은 풍성한 것이고 예는 공손한 것이라(德言盛 禮言恭). 겸손함(謙)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을 세우고도 겸손한 것은 덕과 예를 함께 갖춘 사람이니 그 미래가 밝다는 설명으로 귀결됩니다.
맹지반은 ‘장자’에서 맹자반(孟子反)이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논어’에서 지나치게 소탈한 인물이란 평을 받은 자상백자에 해당하는 자상호(子桑戶)와 ‘맹자’에서 증석과 더불어 광인(狂人)이라 칭한 자금장(子琴張)과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입니다. 그러다 자상호가 죽자 그 장례식장에서 자금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바둑을 둡니다. 공자의 명으로 장례를 도우러 갔던 자공이 기겁하고 돌아와 공자에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습니다.
공자는 “예법의 테두리 밖에 위치한 사람들”이라면서 “무심히 세속 밖에서 노닐며 무위를 업으로 삼아 소요하는 사람들이니 어찌 세속의 예법을 갖춰 사람들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가 되겠느냐”라고 답합니다.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미 전쟁터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어섰으면서 주변사람까지 챙길 줄 아는 역전의 용사다운 호방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