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해봤어?

6편 옹야(雍也) 제12장

by 펭소아

염구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량이 부족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역량이 부족하다 함은 어떻게든 해보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너는 아예 못하겠다고 선을 긋는구나.”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염구왈 비불열자지도 역부족야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자왈 역부족자 중도이폐 금여획



염유(염구)가 말하는 공자의 도는 무얼까요? 전통적 유학자는 학문하는 것을 즐기는 호학(好學)으로 풀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은 염결한 삶을 강조하는 윤리학에 가까운 도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9장에서 공자가 칭송한 안연의 안빈낙도를 받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호학일 경우 염유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소리가 됩니다. 윤리학일 경우엔 영유가 세속적 권력에 눈이 멀어 윤리를 저버린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안빈낙도일 경우엔 염유는 안연처럼 정신적 풍요로움을 지향하는 삶보다는 입신출세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한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현실의 염유는 어떤 사람에 더 가까울까요? 공자가 10대 제자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니 학문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 하긴 힘듭니다. 또 정무감각이 탁월해 계강자의 가재를 거쳐 노나라 대부의 반열까지 올랐으니 안빈낙도의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 염유는 노나라의 국익이나 백성의 이익보다 자신의 보스인 계강자의 이익에 투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자의 반대에도 계강자가 부용국인 전유를 정복할 때도 이를 막지 않았고, 백성의 조세와 군역 부담을 가중시키는 전부법(田賦法)의 시행을 도왔습니다. 권력에 눈멀어 윤리를 저버린 정도까진 아니어도 입신출세를 위해 권력가에게 밉보일 처신을 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봤을 때 공자의 도는 주군에게만 충성하는 것을 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니 곧 군자지도(君子之道)를 말한다고 봐야 합다. 염유의 발언은 공자에게서 군자지도를 배우긴 했지만 막상 현실정치에선 실천에 옮기기에 너무 벅차다는 푸념입니다. 거기엔 ‘스승님은 너무 고매한 이상주의자이셔서 실천하기 힘든 말만 하신다’는 비아냥거림도 숨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응은 “이봐, 해봤어?”라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으면서 왜 미리 포기하느냐는 질책입니다. 염유는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그런 걸 시도했다간 보스에게 찍혀서 설 자리가 없게 될 게 뻔한데 왜 그런 모험을 한단 말입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입니다. 노나라에서 출세한 걸로 치면 염유가 공자를 훨씬 더 앞설 순 있겠지만 두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천양지차로 갈립니다. 염유가 오늘만 살았다면 공자는 어제, 오늘, 내일을 함께 살아갔기에 발생한 차이입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고위공직자는 염유처럼 살지 공자처럼 살 엄두도 못 냅니다. 조선시대 무수한 양반들도 입으론 공맹을 말하면서 염유처럼 입신출세를 목표로 과거시험 합격을 위해 공맹을 달달 외우기만 했을 뿐 그걸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공맹의 가르침을 실천하다간 변덕스러운 왕에 의해 파직을 당하는 것은 물론 유배나 사약까지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소를 한다 해도 자신의 뒤에 있는 유림을 의식한 명분론에 입각하거나 자신이 속한 당파의 당론에 입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공자가 목숨까지 내놓고 간하라 한 것은 아닙니다. 부당한 일이 벌어졌을 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자세로 넘어가지 말고 설사 관철되지 않을지라도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임금이 잘못된 일을 할 경우 신하 중 누군가는 꼭 그 잘못을 지적할 것임을 뇌리에 각인시킴으로써 미래의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오늘만 사는 염유에겐 부질없는 짓으로만 비칠 뿐입니다.


반면 공자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죽기 2년 전 이웃 강대국인 제나라의 실권자였던 전항이 제간공(강임)을 시해하고 그 동생인 제평공(강오)을 제후 자리에 앉히자 노소공을 찾아가 제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간곡히 상주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공자는 노소공과 삼환세력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노구를 이끌고 이를 지극정성으로 주청했던 것은 그것이 군자지도에 부합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소공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가 아니라 대부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으로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이렇듯 군자지도는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가 아니라 천하의 질서를 지키고 자신의 양심의 자유를 위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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