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옹야(雍也) 제11장
공자가 말했다. “현명하구나,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며 누추한 골목에 사노라면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감당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현명하구나, 안회여!”
子曰: “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자왈 현재회야 일단사일표음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현재회야
안연(안회)은 유가뿐 아니라 도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장자’만 읽어봐도 주요 등장인물이 공자와 안연인데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공자보다 안연이 한 수 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 장자가 안연의 학맥을 이었다는 해석까지 나오는 이유입니다.
노장계열에서 안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둘입니다. 첫째 놀라운 재주에도 벼슬길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 장의 내용처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단사표음(簞食瓢飮) 또는 단표누항(簞瓢陋巷)이란 사자성어로 표현되는 안연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벼슬길에도 나서지 않고 공자의 뒤를 쫓아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요절했습니다.
공자는 이를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높이 평가했습니다. 공자 자신도 넘볼 수 없는 경지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자’에는 이와 관련해 공자가 안연에게 “집이 가난하고 지위도 낮은데 왜 벼슬살이를 하려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연은 “성 밖에 50무(畝‧1무는 사방 100보의 면적)의 밭이 있어 죽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고, 성안에 10무의 밭이 있어 옷을 지어 입고 살 수 있다”면서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놀 수 있고 스승님께 배운 도로써 스스로 즐거우니 벼슬살이하고 싶지 않다”고 답합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화답합니다. “‘만족함을 아는 자는 이익으로 스스로를 동여매지 않는다. 스스로 얻은 것을 잘 살피는 사람은 자신 외의 것(외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면 수행을 잘 한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이 말을 오랫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지금 너에게서 그 실천을 보고 그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되었구나.”
공문에서 이런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안연 외에도 여럿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계손씨 가문으로부터 읍재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한 민자건,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사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 밝힌 증석, 공자로부터 직접 벼슬길에 나가라는 제안을 받고도 사양한 칠조개, 가난한 것은 병든 것이 아니라며 자공에게 일갈을 날린 원헌…. 이들은 후대의 노장사상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자는 송나라에서 옻나무를 키우는 장원을 관리하는 하급관리에 자족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들과 공명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노장사상은 의리와 명분에 묶인 인간세상이 아니라 이로부터 자유로운 자연에서 도를 찾아야 하고 무위(無爲)의 통치를 이상화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도 뚜렷합니다. 노자가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국가론을 펼쳤다면 장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대다수의 동양사상 전공자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보다 이 둘과 공자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그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신은 수양에 힘쓰며 재상들에게 정치를 맡긴 요순의 통치를 칭송한 것은 공자가 먼저입니다. 또 증석과 안연 같은 안빈낙도를 지향하는 삶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장자처럼 개인적 자유를 중시하는 삶을 긍정한 것입니다.
다만 국가공동체를 이끌고 갈 군자의 길을 걸을 거라면 개인적 자유보다 공동체의 안위와 복지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군자는 공경대부의 후손을 뜻했지만 공자는 이를 지도자 자질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확대 적용했습니다. 반면 노자는 최고 통치자 1인에 초점을 맞춘 제왕학을 펼쳤기에 그를 제외한 사람은 굳이 도와 덕을 닦아 세상을 번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봤습니다.
노자의 도가 오로지 제왕이 될 사람만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공자의 도는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엘리트 전체에게로 확대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가 군주론자라면 공자는 공화론자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공자의 도를 터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적 기준을 적용하면 국가 지도층이 될 잠재력을 갖춘 20%에게만 요구됩니다. 나머지 80%의 일반인에 해당하는 소인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됩니다. 새로운 현상은 공자에게서 군자학을 배운 제자들 중에서 안연과 증석, 민자건, 칠조개, 원헌 같은 이들이 출현한 점입니다. 도와 덕을 배웠지만 공직을 맡는 대인의 삶을 버리고 소인의 삶을 택하는 일군의 무리입니다.
공자의 군자학이 기획하지 않았던 뜻밖의 현상입니다. 공자는 이런 현상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빈낙도의 삶을 살겠다는 안연과 증석을 칭송한 대목을 보고 있노라면 심지어 부러움까지 느껴집니다. 왜 부러워했을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이 군자학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어진 통치(仁政)를 실현시키는 것이라 믿었기에 제자들의 그런 선택이 로버트 프로스트가 읊은 ‘가지 않은 길’처럼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군자학이 길을 터줬기에 안빈낙도로 가는 길도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안연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장자의 시대가 될 무렵 공자의 길과 거리가 멀어져 처음부터 다른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뿐입니다. ‘장자’에선 때론 공자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다가도 때론 부정하거나 희화화하는 것도 바로 이런 복합적 전통의 산물입니다.
공자가 공화론자라면 장자는 그로부터 파생된 자유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군자학이 군자의 길을 걸을 20%의 소수정예를 겨냥했다면 장자의 사상은 다시 80%에 해당하는 소인의 관점에서 그 20%를 역으로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판의 주체는 군자학을 배우고도 소인의 삶을 택했다는 점에서 '소인의 탈을 쓴 군자'이기도 합니다. 그 시원이 바로 안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