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건은 왜?

6편 옹야(雍也) 제9장

by 펭소아

계씨가 민자건을 비읍의 읍재로 삼으려했다. 민자건이 (사자에게) 말했다. “저를 위해 좋게 거절해 주십시오. 만약 저를 다시 찾아온다면 저는 반드시 문수의 북쪽(제나라)에 가 있을 것입니다.”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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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계열 제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안연의 아버지 안로와 자여의 아버지 증점이었습니다. 공자보다 여섯 살 아래였습니다. 중옹과 염유의 맏형인 백우(염경)은 일곱 살, 자로가 아홉 살 어렸습니다. 민자건은 공자보다 열다섯이 적었으니 이들보다는 후배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논어’에서 위상만 보면 제 계열 제자 중 위상이 가장 높습니다.


공자가 공문십철을 뽑을 때 안연 다음으로 언급한 인물이었고, 웬만한 제자들과 언급될 때 늘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효행에선 으뜸이요 덕행에선 안연 다음입니다. 제 계열 제자 중의 안연이라 할 만합니다.

민자건은 수제학에서만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치평학적 관점에서도 정세를 읽고 대처하는 능력도 남달랐습니다. 젊어서 노소공이 왕실 창고였던 장부(長府)를 삼환 세력에 대한 역(逆)쿠데타의 거점으로 구축하려 한 것이지만 그것이 실패할 것임을 내다봐 공자를 탄복케한 사람입니다(11편 '선진' 제13장).


이 장의 내용을 삼환 세력의 수장인 계손 씨 가문의 무도함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수제학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치평학적 관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자건이 비읍의 읍재 제안을 받은 시점은 아마도 역쿠데타에 실패한 노소공이 축출되고 노정공이 다스릴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계손 씨의 수장은 계환자였는데 가재였던 양화의 반란을 겪고 난 뒤 공문의 제자를 대거 기용했습니다. 자로는 계손씨 가문의 가재로, 자고는 비읍의 읍재로 발탁됐습니다. 그즈음 민자건에게 먼저 비읍 읍재로 기용하겠다는 제안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수(汶水)는 현재의 산둥성에 해당하는 제나라 남쪽과 노나라 북쪽을 가르는 강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같은 제안을 들고 오면 문수에 있을 것"이란 말은 제나라로 망명 가겠다는 뜻이니 단호한 거부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자로와 자고가 받아들인 계환자의 영입 제안을 왜 민자건은 단칼에 거절한 것일까요?


3가지 이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후배인 안연과 마찬가지로 벼슬살이의 의지가 없는 안빈낙도형의 군자일 가능성이 그 첫 번째입니다. 실제 민자건은 이후에도 벼슬을 살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둘째 당시 노나라의 집권가문인 계손 씨 가문에 대한 개인적 환멸이 컸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자들이 적극 지지하는 설입니다.


셋째는 공자가 구상한 ‘삼도도괴(三都倒壞)’가 결국 실패할 것임을 내다본 정무적 판단력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삼도도괴는 삼환세력의 근거지인 세 읍성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삼환세력에 대한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로 자로와 자고를 심은 공자의 정략적 구상을 말합니다. 이는 실제 계손 씨와 숙손 씨 가문까지 설득하는 덴 성공했으나 맹손 씨 가문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공문에서는 공자의 뒤를 이어 백우가 공자가 맡았던 중도의 읍재 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다음 순서가 자로와 민자건이니 아마도 자로에게 계손씨 가재로 기용하겠다는 제의가 갈 무렵 민자건에게도 비읍 읍재 제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때 이미 공자가 삼도도괴 구상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로는 이를 받았고 민자건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자로가 동생처럼 돌봐주던 자고를 데리고 가게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자고가 그만한 깜냥이 안 된다는 공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요.


그럼 민자건이 공자의 암묵적 지시를 받고도 거절한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민자건의 거절 발언은 공자에게 한 것이 아니라 계손씨 가문의 사자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제자이지만 경외했던 민자건에게 직접 제안하기 망설여져 계환자에게 추천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추천으로 영입 제안이 들어오면 웬만하면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자건은 독자적 판단 아래 이를 거절했습니다. 워낙 단호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공자가 다시 설득할 여지조차 남겨 두질 않았죠. 민자건은 평소 공자를 모실 때 항상 온화하고 공손하였기에(11편 '선진' 제12장) 더욱 예상 밖의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초의 안빈낙도형 제자의 등장일까요? 삼환에 대한 환멸이 너무 컸던 탓일까요? 아니면 공자의 속마음을 읽고 그것이 실패할 것임을 내다보고 헛심을 쓰지 않기 위한 포석이었을까요? 제가 볼 때는 셋이 모두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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