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안연을 상찬한 진짜 이유

6편 옹야(雍也) 제3장

by 펭소아

노애공이 물었다. “제자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안회라는 제자가 배움을 좋아했습니다.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일찍 죽고 말아 지금 그가 없는 상황에서 아직 배움을 좋아하는 자를 못 봤습니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애공문 제자숙위호학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공자대왈 유안회자호학 불천노 불이과 불행단명사의 금야즉무 미문호학자야


천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칩거하던 중 외아들이던 백어(공리)도 죽고 애제자였던 안연(안회)도 죽고 난 뒤이니 공자 나이 칠순 전후의 시기로 보입니다. 노나라의 군주인 노애공이 호학(好學)으로 유망한 공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대가 그토록 배움을 좋아한다던데 그럼 공문의 제자 중에서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소?”


공자의 답은 먹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안회라는 녀석이 있어 배움을 좋아했는데 너무 일찍 죽어버린 뒤 그만한 녀석을 못 봤습니다.” 요절한 안연에 대한 애석함이 절절히 배어나는 답변입니다.


다시 음미해 보면 노애공의 질문은 말년의 공자에게 “당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누구요?”를 물은 게 아닐까요? 공자의 귀국을 전후해 염유, 자공, 공서화, 자유, 자하 같은 공문 제자들의 정계 진출이 왕성해지자 그중에 누가 에이스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에둘러 던진 셈입니다. 노애공은 삼환에 맞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할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공자 사후 손잡을 파트너를 미리 점지해 달라는 함의도 담겼을 것입니다.


공자가 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는 제자도 아니고 이미 숨진 제자의 얘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안연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반증입니다. 동시에 공자가 꿈꾼 군자학은 군주와 가신 간의 의리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려는 것 아니었을까요? ‘나와 안연이 꿈꾼 세상은 당신이나 삼환의 무리처럼 아비 잘 만난 덕에 권력투쟁에 능한 것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안연이 호학했다 말하면서 그가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不遷怒, 不貳過)’를 강조한 점입니다. 배움의 대상은 세상의 이치인 도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 다음에 등장하는 내용은 생뚱맞게도 안연의 덕행에 대한 것입니다. 이건 무슨 조화일까요?


이에 대해선 2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안연이 호학을 통해 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자기 수양을 통해 덕 또한 출중했다고 풀이하는 것입니다. 도뿐 아니라 덕까지 겸비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두 번째는 호학의 결과로 불천노와 불이과의 덕목을 갖추게 됐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호학이 원인이고 불천노와 불이과가 그 결과라는 뜻입니다. 즉 안연이 공부를 통해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긴 지행일치의 실천가로 보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 편을 들겠습니다. 불천노는 무언가로 인해 화가 나게 됐을 데 그 분풀이를 다른 데에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불이과는 공자가 무수히 강조했던 물탄개과의 실천입니다. 이를 덕에 해당하는 윤리의 실천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잘못 적용한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짓입니다. ‘잘못을 저질러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는 과학적 원리에 부합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2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진정한 호학의 기준이 지행일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연이 단순히 호기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행일치를 실천했기에 공자로부터 진짜 호학자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도의 터득을 실천으로 옮기다 보면 덕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차별적 도와 인간적 덕을 조율하는 어짊(仁)에 있어서 배움(學)이 더욱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가 안연을 어짊을 그토록 상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맹자나 주자처럼 도와 덕을 등치 시키는 우를 범해선 안 됩니다. 둘이 등치 될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이를 조율하기 위해 어짊이 필요함을 망각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도와 덕을 등치 시켜버리면 자연적 도리와 인간적 윤리를 동일시하는 성리학의 병폐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간사회에 제한적으로 적용될 윤리가 자연법칙인 도리를 집어삼키는 윤리만능주의로 귀결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 결과 객관적 자연법칙에 대한 학습을 등한시하고 공리공론에 가까운 도덕주의만 떠들어대는 병폐를 낳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윤리가 도리로 둔갑하는 순간 어짊의 존재이유도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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