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공야장(公冶長) 제21장
공자가 말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슬기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었다. 그 슬기로움은 따라갈 수 있어도 그 어리석음은 따라갈 수 없다.”
子曰: “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자왈 영무자 방유도즉지 방무도즉우 기지가급야 기우불가급야
영무자(甯武子)는 공자보다 100년 전 쯤의 위나라의 대부입니다. 본명은 유(兪)이고 시호가 무(武)입니다. 그는 제환공이 패자(覇者)일 때 위나라 제후였던 위문공과 진문공이 패자일 때 위나라 제후였던 위성공 2대에 걸쳐 대부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위문공은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까지 함락됐던 위나라를 재건한 명군으로 꼽힙니다. 반면 그 아들인 위성공은 재위 초기 남방의 강대국인 초나라 편을 들었다가 북방 강대국인 진(晉)나라의 공격을 받아 제후의 자리에서 밀려나 3년간 국외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위문공 재위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위성공 재위기로 나눠봅니다.
문제는 ‘춘추좌전’과 ‘전국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영무자의 활약상이 위문공 때는 없다가 위성공 때만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주자는 이에 대해 위문공 때는 알아서 나라가 잘 돌아갔으니 굳이 두각을 나타내지 않음이 현명함이요, 위성공 때는 난세였기에 힘들고 고달플 것임을 알면서도 전면에 나선 것을 어리석음이라 역설적으로 칭한 것이라고 풀었습니다.
그럼 영무자의 구체적 활약상을 한번 살펴볼까요? 위성공은 아우 숙무에게 보위를 맡기고 진나라에 억류돼 있다가 진초 양국이 자웅을 겨룬 성업전투에서 진나라가 승리하자 뇌물로 진문공의 환심을 사서 다시 제후의 자리를 되찾습니다. 이때 위나라를 지키고 있던 영무자가 위성공을 수종했던 신하와 위나라에 남아있던 신하를 모아놓고 서로 반목하지 말자는 맹약을 이끌며 내부분열을 막는 현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9년 뒤 영무자는 사신으로 노나라에 파견됩니다. 당시 노나라 제후인 노문공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면서 ‘담로(湛露‧흠뻑 내린 이슬)’와 ‘동궁(彤弓‧붉은 활)’이란 예악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는 ‘시경’ 소아 편에 실린 노래로 본디 왕(천자)이 제후를 위해 연회를 열 때 연주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영무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아하게 여긴 노문공이 중간에 사람을 시켜 그 이유를 묻자 영무자는 “악공들이 연습하는 줄로만 알았다”면서 모르쇠 전략을 펼쳤습니다. 노문공은 일개 제후요, 자신은 제후를 모시는 대부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천자가 제후들을 위무할 때 연주하는 곡이 자신을 위해 연주됐다고 여길 수 있었겠느냐며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들 에피소드만 놓고 보면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오랜 기간 비어있던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위성공이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이때 슬기롭다고 한 것은 혹여 위나라의 군신이 반목하고 분열할 것을 막기 위해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덮고 가자는 서약을 끌어낸 것입니다.
또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노나라가 예악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것을 말합니다. 이때 어리석다고 한 것은 노문공의 잘못을 현장에서 바로 대놓고 지적해 부끄럽게 만들기보다는 자신이 어리숙해 몰랐던 것처럼 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노문공까지 불경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 되도록 배려한 것을 말합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둘 다 현명한 처사입니다. 그럼에도 공자가 후자의 사례를 “따라가기 어렵다”고 더 높이 평가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논어’보다 후대에 쓰인 ‘도덕경(道德經)’에서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졸렬한 듯하고, 크게 말 잘하면 어눌한 듯하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辨若讷)“라고 표현한 역설적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다(大智如愚)”라고 요약한 사람은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공자를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