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공야장(公冶長) 제19장
자장이 물었다. “초나라 재상 자문은 세 차례나 재상으로 등용됐지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고, 세 차례나 면직됐지만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상 직을 떠날 때는 신임 재상에게 반드시 인수인계를 마쳤습니다.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충실한 사람이다.” 자장이 물었다. “어질다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모르겠다. 어찌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제나라 대부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했을 때 또 다른 대부 진문자는 10승의 전차를 끌 말 40필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최저 같은 사람이 있구나’하고 떠났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 가서도 ‘최저 같은 사람이 있구나’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맑은 사람이다.” 자장이 물었다. “어질다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모르겠다.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느냐?”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無喜色, 三已之無溫色. 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 何如?”
자장문왈 영윤자문 삼사위영윤무희색 삼이지무온색 구영윤지정필이고신영윤 하여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왈 충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최자시제군 진문자유마십승 기이위지 지어타방 즉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지일방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즉우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하여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왈 청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자문(子文)은 초나라의 재상인 영윤을 여러 차례 지낸 투누오도(鬪穀於菟)의 자(字)입니다. 초나라 군주로 처음 왕을 칭한 초무왕 시절 영윤을 지낸 투(鬪)씨의 시조 투백비의 아들입니다. 초나라 사투리로 누(穀)는 젖먹이, 오도(於菟)는 호랑이를 뜻합니다. 투백비의 사생아로 태어나 늪에 버려졌는데 호랑이 젖을 먹고살아났다 하여 생긴 이름입니다.
공자보다 대략 150년 전 인물인 자문은 초무왕의 손자인 초성왕의 전성기를 이끌어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다면 초성왕에게는 자문이 있었다”는 평판을 들은 명재상입니다. 처음 영윤이 됐을 때 초나라의 어려운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었다고 전해집니다. ‘춘추좌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영윤의 자리에 몇 차례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영윤이 되고 마지막으로 영윤의 자리에서 물러난 시기가 28년에 이릅니다.
최자(崔子)와 진문자(陳文子)는 제나라의 대부로 제영공, 제장공, 제경공 때 활약한 인물이니 공자보다 50세 정도 위입니다. 최자는 이름이 저(杼), 무공이 뛰어나 최무자((崔武子) )로도 불립니다. 제영공 때 군사작전에 공을 세웠고 제영공이 죽은 뒤 태자의 지위에서 밀려났던 제장공을 제후로 옹립합니다. 그러나 제장공이 자신의 아내와 사통한 것을 알고 제장공을 시해하고 다시 그 동생인 제경공을 제후에 앉힙니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최측근이던 경봉(慶封)에 의해 멸문지화를 입고 자결합니다.
진문자는 이름이 수무(須無), 문(文)은 시호입니다. ‘춘추좌전’에 따르면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난 현자(賢者)입니다. 최저가 포악해 제 명에 못 살 것을 예측했고 영공이 시해되자 “역적과 함께 조정에 설 수 없다”면서 아들 진무우(陳無宇)와 함께 송나라로 몸을 피합니다. 10승의 전차를 굴리려면 40필 이상의 말이 있어야 했으니 상당히 부유했지만 이를 버리고 도피한 것입니다. 그렇게 외국을 떠돌다 최저가 죽자 제나라로 돌아와 다른 대부들과 협력해 경봉을 국외로 추방시킵니다. 진환자(陳桓子)로 불리게 된 진무우는 경봉의 집을 허물고 나온 목재를 백성들에게 나눠줘 민심을 얻습니다.
여기서 질문. 자장은 왜 하필이면 투누오도와 진수무를 꼭 찍어서 “어질다고 할 수 있느냐”고 했을까요? 자장은 공문에 입문할 때부터 입신출세의 야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공자에게 어떡하면 출세(현달)할 수 있느냐와 정치를 잘하는 법 등을 집요하게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설과 진(陳)나라 공실 출신이라는 설이 엇갈립니다.
진나라 공실 출신이라는 설은 ‘춘추좌전’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기원전 672년 진나라에서 내분이 발생해 진나라 공실의 후손 두 명이 제나라로 망명합니다. 그중 한 명은 진문자의 선조가 되는 진완(陳完)이고 다른 한 명은 전손(顓孫)입니다. 진완은 제나라에서 전(田) 땅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훗날 제나라 전 씨의 시조가 되고 전손은 다시 노나라로 건너가 노나라 전손 씨의 시조가 됩니다. 자장의 본명이 전손사(顓孫師)이니 진나라 공실 출신 전손의 후손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장이 진나라 공실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면 비슷한 처지로 제나라에서 존경받는 대부가 된 진수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진수무는 재상의 반열까지 오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장의 역할모델은 투누오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투누오도 역시 초나라 공실 출신으로 사생아로 버려졌다가 초나라의 명재상으로 불린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장은 자신의 첫 번째 역할모델인 투누오도가 어질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이어 진수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서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8편 ‘태백’ 제13장)고 한 공자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질문으로 봐야 합니다. 자장의 뇌리 속에서 투누오도가 천하에 도가 있을 때 나서서 현달한 인물을 대표한다면 진수무는 천하에 도가 없을 때 몸을 숨겨 이름을 더럽히지 않은 인물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투누오도에 대해선 충(忠)하다 평하고 진수무에 대해선 청(淸)하다 평하면서도 어질다고 하기엔 부족하다고 답합니다. 忠은 양심에 충실하다는 뜻입니다. 일국의 재상이 짊어져야 할 중압감이 크기에 발탁됐다 하여 일희일비하지 않고 또 후임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철저히 한 것은 부끄럼 없는 삶을 지향한 것이라 풀이한 것입니다.
淸은 맑다,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진수무의 선조인 진완은 상업이 발달한 제나라에서 다양한 기술을 지닌 백공(百工)을 통솔하는 공정(工正)을 맡아 상당한 부를 축적합니다. 진수무 대에 이르면 대부로서 충당해야 하는 말 40필을 훌쩍 넘는 자산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그 재산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피신했고 그렇게 옮겨간 나라에서도 못 볼 꼴을 보면 떠나가기를 반복했으니 공자가 말한 ‘난방불거(亂邦不居)’의 실천자라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공자의 어짊의 기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어짊은 덕 외에 도도 중요하니 사람됨만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투누오도가 재상으로 모시던 초성왕은 초기엔 국력신장을 이뤄 제환공, 진문공과 더불어 패자의 지위를 다툴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문덕(文德)을 통한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중원을 위협하고 굴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 초성왕은 오만해져서 제후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짓을 많이 저지르다가 결국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하의 손에 살해되고 맙니다. 투누오도가 어짊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수무의 경우는 제나라로 돌아와 식읍과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풀어 백성의 환심을 사서 그의 아들인 진환자 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린 끝에 증손자인 진항(전항) 때 재상의 자리를 꿰차더니 자신이 제후로 옹립한 제간공(강임)을 시해하게 됩니다. 진수무가 그토록 혐오했던 짓을 결국 자신의 증손자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공자는 이에 분개해 노구를 이끌고 조정에 나가 군사를 일으켜 전항을 징치할 것을 주청했습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약 100년 뒤 진항의 후손이 결국 제나라 왕좌를 찬탈하게 됩니다. 공자는 제나라가 전 씨의 나라가 되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제경공 사후 전항의 전횡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진수무를 어질다고 평가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여(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충서(忠恕)’라고 주장했습니다. 충은 자기 충실을 말하고, 서는 타인 배려를 뜻합니다. 공자가 강조한 어짊은 결코 이러한 충서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투누오도의 충과 진수무의 청만으로는 어짊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어짊은 충서와 같은 수제의 덕뿐 아니라 국가운영의 원리를 터득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치평의 도를 함께 갖춰야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투누오도의 초나라는 문덕을 몰랐기에, 진수무의 후손은 부강(富强)만 추구하다 주화입마한 진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