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을 보면 공자가 보인다

5편 공야장(公冶長) 제16장

by 펭소아

공자가 자산에 대해 말했다.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다. 그 행실은 공손했고, 윗사람을 섬김에 정성을 다했고, 백성을 돌봄에 있어선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선 의로웠다.”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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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子産)은 제나라의 안영과 더불어 공자가 가장 높이 평가한 재상이었습니다. 공자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로 안영보다 10세 안팎 손위로 추정됩니다. 자산은 자이고 이름은 교(僑), 시호는 성(成)이었습니다. 공손교(公孫僑)로 불리는데 공손은 춘추시대 공실의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니 본디 성은 정(鄭)나라 공실과 같은 희(姬)였고, 씨 역시 정(鄭) 또는 국(國)이었습니다. 시호를 붙여 공손성자(公孫成子)라고도 하지만 주로 정자산으로 불렸습니다.


안영이 ‘논어’에 1차례 등장한다면 자산은 3차례나 등장하는데 찬사 일색입니다. 14편 헌문 제8장에선 자산이 이끈 외교 드림팀의 역할분담을 상찬했고, 제9장에선 춘추시대 유명 재상들 중에서도 자산을 첫머리에 언급하면서 자비로운 사람(惠人)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 장에선 공경혜의(恭敬惠義)의 4개의 도를 갖췄다는 찬사를 받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안영은 춘추시대 최고의 영웅 관중과 나란히 초반에 등장합니다. 사마천은 그 말미에서 “안영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든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그를 흠모한다”하여 특별한 애정을 피력했습니다. 반면 자산은 법을 공평하게 적용한 관리들을 모아놓은 ‘순리(循吏) 열전’의 다섯 명 중 두 번째 인물로 짤막하게 소개됐을 뿐입니다. 객관적으로 안영이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강대국이었던 제나라의 재상으로 천하를 호령했다면 자산은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를 강소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에 멈췄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반대로 안영보다 자산을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 개혁의 역할모델로 강대국인 제나라보다 강소국인 정나라가 더 어울린다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천자국인 주나라 바로 옆에 위치한 정나라는 중원의 한복판에 위치해 국력이 강할 때는 사방팔방으로 뻗어갈 수 있지만 국력이 약해지면 반대로 동네북 신세가 되곤 했습니다. 특히 기원전 7세기 초 집권했던 정목공의 일곱 아들의 가문인 칠목(七穆)이 국가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과두정이 이뤄지면서 춘추전국시대 내내 동네북 신세가 됩니다. 노나라에 삼환이 있었다면 정나라에는 칠목이 있었던 셈입니다.


정나라는 특히 기원전 6세기 남방의 초나라와 북방의 진(晉)나라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신세로 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 이례적으로 자산이 재상을 맡았던 23년간 그런 약소국의 설움에 벗어나 강소국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사자나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고슴도치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산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 걸까요?


대내적으로는 과두정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제도개혁과 법령선포를 통해 일곱 가문의 자의적 지배에 고삐를 채웁니다. 대외적으로는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한 능수능란한 외교관들을 통해 강대국 하나가 일방적으로 정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합니다. 국내외에서 모두 세력균형을 추구했지만 대내적으로 균형인사, 대외적으론 소수정예 인사로 돌파구를 마련한 것입니다.


제도개혁을 보면 제후가 상주하는 국(國)과 대부가 머무는 도(都), 일반 백성이 거주하는 읍(邑)으로 나눠 차별화된 세금을 물리고 토지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536년에는 춘추시대 최초의 법조문을 세발 솥에 명문화합니다. 맹자와 같은 유자들은 이것이 법가의 시초가 됐다고 비판하지만 귀족의 자의적 수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 봄이 타당합니다.


실제 ‘사기’에 따르면 자산이 집정한 지 1년 만에 무뢰배가 설치지 못하게 됐고, 노인과 어린이가 힘든 일을 면하게 됐다고 합니다. 2년째는 바가지상술이 사라지고 공정거래가 이뤄졌으니 경제가 안정된 것입니다. 3년째는 밤에 문단속을 하지 않아도 됐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이 없었으니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입니다. 5년째는 남자들은 군복무가 면제되고 백성들이 알아서 상례를 잘 지키게 됐으니 평화와 교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26년 뒤 자산아 숨지자 청장년은 실성해 통곡하고, 노인은 어린애처럼 흐느끼면서 “백성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 하리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공자는 이런 자산의 정치력을 4개의 도로 압축했습니다. 공(恭)은 나랏일을 처리함에 있어 아래위 두루 신망을 얻을 때의 겸손한 자세를 말합니다. 경(敬)은 특히 임금을 모실 때 정성을 다함으로써 귀족의 발호를 억제하고 수직적 봉건질서를 잘 유지했음을 뜻합니다. 혜(惠)는 귀족들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들의 민생고 해결과 복리후생 마련에 힘쓴 것을 압축한 것입니다. 의(義)는 백성에게 세금을 물리고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할 때 철저히 공익과 합리를 앞세웠음을 말합니다.


공자는 그런 자산을 혜인(惠人)으로 불렀으니 4개의 도 중에서 백성의 복리후생을 가장 중시한 것을 가장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공자의 정치 9계명(20편 ‘요왈’ 제2장) 중에서 ‘베풀되 헤프지 않은 것(惠而不費)’이 첫머리에 오른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정치의 다섯 가지 미덕(五美)의 두 번째는 ‘백성을 부리되 원망 사지 않는 것(勞而不怨)’이고 세 번째는 ‘바라되 탐하지 않는 것(欲而不貪)’이니 이는 자산의 의(義)와 연결됩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인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은 것(泰而不驕)’과 ‘위엄 있으되 사납지 않은 것(威而不猛)’은 자산의 공(恭)과 경(敬)에 이어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산 정치의 핵심은 ‘관맹상제(寬猛相濟)’로 요약됩니다. 너그러움(寬)과 엄격함(猛)이 상호보완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자산은 이를 물과 불에 비유하며 “물에 빠져 죽는 백성이 불에 타 죽는 백성보다 더 많다”면서 관대함보다 엄격한 법질서 확립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춘추좌전’에서 공자는 이에 대해 “정책이 관대하면 백성들이 경박해지고, 경박해진 백성을 바로잡으려면 정책이 엄격해야 하니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결합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공자가 이런 자산의 정치를 당시 노나라 정국에 적용했다면 어떠했을까요? 후대의 유자들 생각처럼 삼환정치를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해 척결하기보다는 골고루 포용하는 정책을 썼을 것입니다. 또 북방의 진(晉) 제(齊)와 남방의 초(楚) 오(吳) 월(越)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이 백성의 곤궁한 삶을 편안하고 풍족하게 해 주기 위함이었을 테니 당연히 토지개혁과 세제개혁을 추진했을 것이며 법령의 제정과 반포 또한 이뤄졌을 것입니다.


이렇듯 공자의 예치(禮治)는 맹자가 구상한 덕치(德治)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산의 관맹상제를 계승해 덕치와 법치의 병용이었습니다. 또 한나라 이후 겉으론 유가를 표방하면서 내용상으론 법가로 다스리는 외유내법(外儒內法)의 전통을 씨앗으로 품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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