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공야장(公冶長) 제15장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는 어째서 문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일처리가 빠르면서도 학문을 좋아했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문이라고 이른 것이다.”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공문자(孔文子)는 위나라의 대부 공어(孔圉)를 말합니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귀국한 뒤 위령공의 무도함을 설파하자 듣고 있던 계강자가 “그런데도 위령공이 제후의 지위를 어떻게 잃지 않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공자는 외교에 중숙어, 의례에 축타(사어), 군사에 왕손가라는 3명의 신하가 있어서라고 답합니다(14편 ‘헌문’ 제19장). 여기서 중숙어가 공어를 말합니다.
공어는 위성공 때 집정대부(재상)인 공달(孔達)의 4세손이자 자로가 가재로 섬겼던 공회(孔悝)의 부친입니다. 공달은 위니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자 모든 책임을 떠안고 목을 매 자결했기에 위나라의 충신으로 떠받들어졌습니다. 공어는 그 후광에 스스로 박식했기에 위령공 시절 외교로 명성을 얻었고 위령공이 죽자 국외 추방상태이던 태자 희괴외 대신 손자인 희첩(위출공)을 제후로 세우고 집정대부가 됐습니다.
집정대부가 된 이후 공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할 법한 일을 벌입니다. 역시 위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대부의 자리에 있던 태숙질(大叔疾)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냅니다. 문제는 태숙질에겐 원래 조강지처가 있었다는 것. 바로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의 정인으로 소문난 미남자 송조(宋朝)의 딸이었습니다.
위출공은 제후가 되자 자신을 제후에 앉힌 할머니 남자를 폐위하는 강수를 둡니다. 공어가 막후조정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로 인해 그의 정인이던 송조가 외국으로 망명을 가게 되고 태숙질은 끈 떨어진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로운 실세인 공어의 딸과 재혼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공어가 구상한 대로 그림이 딱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공어가 생각하지 못한 퍼즐조각 하나가 전체 그림을 망쳐놓습니다. 송조에겐 딸이 하나 더 있었는데 태숙질은 조강지처보다 그 처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강지처는 내쫓으면서 처제와 따로 살림을 차렸습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공어는 대로해 태숙질을 치기로 하고 공자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공어의 후의 아래 위나라에 3번째로 머물고 있던 공자는 “호궤지사(胡簋之事‧제례에 쓰는 그릇을 다루는 일이니 의례 관련 업무)는 알아도 갑병지사(甲兵之事‧갑옷입은 병사의 일이니 군사 관련 업무)는 알지 못한다”라고 사양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떠날 차비를 하며 “새가 나무를 가려 깃들 순 있어도 나무가 어찌 새를 가릴 수 있겠는가(鳥則擇木, 木豈能擇鳥)”라 말합니다.
새는 공자요, 나무는 위나라 또는 공어를 뜻하나니 공자가 두 번째로 위나라를 떠날 때도 위령공이 군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임을 환기시키는 일갈입니다. 공어는 위령공과 달랐습니다. 황급히 공자를 만류하며 “내가 어찌 감히 사적인 일로 그 같은 일을 도모하겠소? 위나라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물은 것뿐이오”라고 변명합니다. 그리곤 태숙질을 치는 대신 딸만 데려옵니다.
얼마 안 돼 노나라에서 예물을 보내며 공자를 초청했고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갑니다. 태숙질은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신의 식읍이 아닌 곳의 여인과 통간하다가 탄로가 나 수레를 뺏기고 위출공에게 고변을 당합니다. 여자문제로 두 번이나 망신을 산 그는 결국 송나라로 도피해 악명 높은 사마상퇴의 가신이 돼 또 송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태숙질이 망명한 뒤 그의 대부 지위와 식읍을 동생인 태유(大遺)가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자 공어는 다시 자신의 딸을 태유에게 시집보냅니다. 공어는 그 뒤 얼마 안 돼 숨져 문(文)이란 시호를 받아 공문자로 불리게 됩니다. 그의 아들인 공회(孔悝)가 집정대부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가재로 자로를 초빙합니다.
공어의 부인이자 공회의 어머니 공백희는 희괴외의 누나였는데 괴외는 이를 이용해 위나라로 잠입 우유부단한 공회를 협박하자 아들인 위출공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 제후(위장공)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자로는 주군인 공회를 지키려다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위장공을 제후로 옹립할 수밖에 없었던 공회는 위장공의 축하연에서 만취했을 때 위장공의 기습을 받게 돼 모친 공백희를 수레에 태우고 송나라로 망명가게 됩니다. 반대로 송나라로 망명가 있던 태숙질은 위장공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다시 위나라 대부가 됩니다.
주희는 ‘춘추좌전’의 이 같은 기록을 토대로 공어가 정략결혼을 일삼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무도한 사람인데 어떻게 문(文)이란 시호를 받게 됐는지에 대한 힐난의 의미로 자공이 질문했다고 풀었습니다. 과도한 해석입니다. 당시 정략결혼은 비일비재한 것이었고 형사수취(兄死嫂取) 역시 드물지 않았으니 형에게 시집보낸 딸을 다시 동생에게 시집보낸 것 역시 크게 탓할 바 아닙니다.
오히려 위령공과 달리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공자의 일갈에 잘못을 깨닫고 이를 시정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문덕(文德)의 자질을 지녔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공자와 관계가 계속 좋았고 자로가 그 아들의 가재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따라서 자공의 질문 또한 힐난의 의미가 담겼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공이 보기에 자신처럼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공어가 집정대부가 되고 문이란 시호를 받게 된 것이 부러워 그 비결을 물은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공자 또한 이를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자공이 일처리가 빠르긴 하지만 자신이나 안연만큼 호학하지 않음을 경계하기 위해 ‘민이호학(敏而好學)’을 꺼내든 것입니다. 또 자공이 두뇌회전이 빠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살짝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을 경계해 ‘불치하문(不恥下問)’을 말한 겁니다.
주나라 문왕에서 경왕까지 역사가 기록된 ‘일주서(逸周書)’라는 고서에는 시호의 원칙을 소개한 ‘시법(諡法)’편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문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경우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천지를 경위(經緯)한 사람(천하의 질서를 잡은 사람), 둘째 도덕박후(道德博厚)한 사람, 셋째 열심히 배우고 질문하기 좋아하는 사람, 넷째 지혜로우며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 다섯째 일반 백성 중에서 인재를 발탁한 사람입니다.
공자의 설명에 따르면 공어는 세 번째 열심히 배우고 질문하기 좋아하는 자에 해당합니다. 공자는 위령공 시절 집정대부였던 공숙발이 공숙문자(公叔文子)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칭송했습니다(14편 ‘헌문’ 제18장). 공숙발의 경우는 자신의 가신이었던 선(選)을 대부로 추천한 것을 두고 공자가 문이라는 시호를 받을만하다고 칭송한 것은 다섯 번째에 해당합니다.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