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가 흠모한 꺼꾸리

5편 공야장(公冶長) 제17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안평중은 사람들과 잘 사귀는데, 오래 사귄 사이일수록 상대를 더 정중하게 대했다.”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자왈 안평중선여인교 구이경지



안평중은 ‘사기열전’에서 관중과 이름을 나란히 올린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晏嬰)입니다. 시호는 평(平), 자는 중(仲)이어서 안평중으로 불립니다. 정나라의 자산과 더불어 공자가 가장 존경한 재상입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조상은 송나라 명문가 출신인데 할아버지 때 제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아버지 안약(晏弱)은 이웃한 내(莱)나라를 정벌해 상대부에 올랐습니다. 안영은 제영공-제장공-제경공 3대에 걸쳐 대부를 지내 안자(晏子)로 불렸으며 제경공 때 재상으로 발탁돼 제나라 제2의 전성기를 이끕니다.


그의 이름인 영(嬰)은 ‘어린아이’란 뜻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 부친이 건장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일부러 반대의 뜻을 담은 이름을 지어줬다는데 다 커서도 150㎝안팎의 왜소한 체구였다고 합니다. 그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영왕이 대궐문을 걸어 잠그고 신하들을 시켜 그 옆의 개구멍으로 들어오라고 종용한 것도 이를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안영은 “내가 개의 나라에 온 것인가? 어찌 사람더러 개구멍으로 들어가라 하는가?”라는 일갈로 단숨에 대궐문을 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기선제압을 당한 초영왕은 안영을 보자마자 “제나라에 인물이 그렇게 없는가? 당신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게”라고 계속 시비를 겁니다. 이때 안영은 “제나라는 큰 인재는 큰 나라에 보내고, 작은 인재는 작은 나라에 보냅니다”는 말로 다시 끽소리 못하게 만듭니다. 안영은 이어 박학다식함과 정보력으로 초나라의 대신들을 휘어잡아 감히 맞상대하러 나서는 사람이 없게 만듭니다.


마침 제나라 출신 도둑이 끌려오자 초영왕이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까지 와서 도둑질을 하다니 제나라 사람은 죄다 도둑인가 보오”라고 회심의 펀치를 날립니다. 그러자 안영은 “귤이 회수 북쪽으로 건너면 탱자가 되듯 순박한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와서 물든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사자성어의 어원이 된 이 말에 초영왕은 결국 “내가 졌소”라는 자세로 안영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됩니다.


송유는 공자가 말이 어눌한 사람을 좋아했다는 억지를 부리곤 하는데 공자가 흠모했던 안영이나 자산은 모두 이처럼 말발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안영은 공자가 평소 상찬하던 일을 몸소 행동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상을 지켰습니다. 검소하고 청렴해 재상이 된 뒤 30년간 여우털로 지은 외투 한 벌로 버텼으며, 한 끼에 고기반찬이 하나 이상 넘지 않게 했고, 집도 시장 근처의 평범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안영은 강단 있는 의리의 사내였습니다. 제나라의 대부로 한 성깔 하던 최저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아내와 밀회하려던 제장공을 시해한 뒤 “나는 주군을 죽인 게 아니라 내 아내의 상간남을 죽인 것”이라며 기세등등하게 설칠 때 홀로 그 집을 찾아가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주군의 죽음을 외면한단 말인가”라며 제장공의 시신 앞에서 예를 올립니다. 또 최저와 경봉이 제경공을 제후로 옹립한 뒤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자신들에게 딴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세의식을 강요할 때 홀로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사직을 이롭게 하지 않는 자와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서약문을 바꿔 맹세합니다. 최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안영의 신망이 높은 것을 알았기에 오직 안영에게만 예외를 허락합니다.


최저와 경봉이 차례로 몰락한 뒤 안영은 자연스럽게 재상의 직에 올랐지만 제경공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중에 공자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 있습니다. 제경공이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준 신하에 대해 “내 마음에 부합하는 이는 너밖에 없다”라고 하자 안영은 “맞장구치는 것(同)을 갖고 어찌 마음이 맞는다(和)고 하느냐”라고 반박합니다.


그는 동과 화의 차이를 묻는 제경공에게 “화(和)는 음식에 비유하면 조미료로 부족한 맛을 보충하고 지나친 맛은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며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도 군주가 잘못하는 것은 고치게 하고, 잘하는 것은 북돋아주는 것이 마음이 맞는 것(和)이고 군주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다 하고, 싫다 하면 자기도 싫다고 맞장구치는 것을 동(同)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13편 ‘자로’ 제23장에 나오는 “군자는 어울릴 줄 알되 동화되진 않는다(君子和而不同)”와 공명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남다른 재주와 말발을 지닌 사람은 오만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안영은 오만이나 교만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재상시절 안영의 수레를 몰던 사인은 매우 우람한 체구를 자랑했는데 키가 작았던 안영과 극명한 대비를 이뤘습니다. 재상인 안영은 다소곳했던 반면 마부는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를 본 마부의 아내가 “마부인 당신이 어떻게 재상인 안영보다 기세등등하냐”면서 이혼을 요구하자 정신을 번쩍 차린 마부의 태도가 공손하게 바뀝니다. 그 변화를 감지한 안영이 그 연유를 듣고선 공자가 반색할 이야기를 하며 마부를 대부로 추천합니다.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그를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를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장은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안영이 당당함과 겸손함을 겸비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일깨워줍니다. 첫째 사람을 잘 사귀었다는 말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척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평소 최자와 경봉 같은 무부(武夫)와도 사이좋게 지냈기에 안영의 튀는 언행에 대한 반감이 덜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안영이 자신들 말고도 조정의 대신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음을 알기에 더욱 처치 곤란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 사귐에는 화이부동의 정신이 깔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되 다른 사람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는 상호존중의 정신이 깔려 있는 교우관계였기에 안영이 튀는 행동을 해도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초영왕과 대화에서 보듯 상대가 공격할 때 그 힘을 역이용해 반격을 가할 뿐이었기에 상대방 마음에 앙금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승복한 뒤에는 교우관계가 오래 가게 됩니다. 초영왕이 재위하는 동안 제나라를 단 한 차례도 공격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공자가 생각한 문덕(文德)의 핵심입니다.


안영은 공자보다 한 세대 윗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경공과 공자 간에 오간 대화가 기록된 ‘논어’의 내용(12편 ‘안연’ 제11장과 18편 ‘미자’ 제3장)을 토대로 제경공이 공자를 기용하려 했는데 안영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설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안영의 언행을 기록한 ‘안자춘추’는 전국시대에 편집됐는데 거기에 공자를 기용하려는 제경공을 만류한 안자의 발언이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요약하면 유자들의 말은 겉으로만 그럴듯할 뿐 허황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니 백성의 실질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국시대 유자들의 행태를 비판한 글이지 공자를 겨냥한 글이 아닙니다. 또 공자와 제경공 간 대화는 기본적으로 노나라와 제나라 간 협곡회동 때 만남에서 이뤄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안영은 협곡회담이 이뤄진 다음 해 숨졌기에 공자와 안영의 만남이 이뤄졌는지도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안영이 공자의 기용을 반대했고 그럼에도 공자가 안영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 후대의 ‘악마의 편집’으로 봐야 합니다. 실제 공자와 안영의 만남이 이뤄졌다면 진풍경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m가 넘는 거구와 150㎝의 단구 간에 진짜 화이부동이 뭔가를 보여주는 대화가 오갔을 테니까요. 그 만남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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