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공야장(公冶長) 제6장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길에 나가게 하려하자 칠조개가 답했다. “저는 이를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공자가 기뻐했다.
子使漆彫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자사칠조개사 대왈 오사지미능신 자열
칠조개(漆雕開)는 공문 72현 중 한 명입니다. 성은 칠조(漆雕), 이름은 계(啓), 자가 자개(子開) 또는 자약(子若)입니다. ‘중니제자열전’에는 노나라 출신으로 나오고 ‘공자가어’에는 채나라 출신으로 나오는데 초기 제자라는 점에서 노나라 출신일 공산이 더 큽니다. 공자보다 11세 아래였으니 염백우(7세 연하), 자로(9세 연하), 민자건(15세 연하)과 동년배였습니다.
공자가 지천명 전후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서면서 백우와 자로도 모두 벼슬길에 나섰는데 칠조개와 민자건은 사양했습니다. 군자학은 치평의 도와 수신의 덕을 갈고닦은 뒤 벼슬길에 나서 경세제민에 나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세간의 학문입니다. 헌데 공자는 벼슬길을 사양하고 안빈낙도의 출세간의 삶을 택하려는 제자들을 볼 때마다 기뻐하고 격려하기 일쑤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공자가 생각한 군자의 선택지에는 입세간과 출세간이 모두 들어있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군자의 기본자세는 ‘용행사장(庸行舍藏)’이니 기용되면 배우고 깨친 바를 펼치고, 발탁되지 못하면 이를 감추고 지내는 것(7편 ‘술이’ 제10장)입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치평의 도와 수제의 덕을 갖췄더라도 스스로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생각되면 출세간을 택할 수 있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출세간은 단순히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군자학의 비의(秘意)를 후대에 면면히 전승해 때가 무르익었을 때 꽃피고 열매 맺도록 하는 책무를 묵묵히 짊어진다는 의미까지 함의한다고 봐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예(禮)의 기본적 마음가짐으로서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한 것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출사에 나설 만큼 충분한 수양을 쌓았음에도 스스로 “아직 갈 길이 멀었다”면서 자중자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의 징표로 받아들였을 수가 있습니다.
‘공자가어’는 칠조개가 정강이를 잘리는 형벌인 빈형(臏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힘으로 걷기 힘들었을 것이니 단순한 사양지심의 발휘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결국 벼슬길에 나섰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군자학으로 일가를 이뤘음은 확인됩니다. ‘한비자’에 유가의 팔대 학파로 소개된 팔유(八儒) 중 하나로 칠조(漆雕)가 당당히 언급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칠조파의 선비들은 “누구를 대하든 안색을 바꾸지 않고,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비굴하게 처신했을 때는 노비를 만나도 피했지만 올곧게 행동했을 때는 제후에게도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주들이 청렴하다 여겨 예로 대우했다”라고 하니 공문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학맥을 이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공자가 기뻐한 것은 단순히 칠조개가 벼슬길에 뜻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충분히 출사 할만한 내공을 갖췄음에도 입신출세보다는 군자학의 비의를 지키면서 후대에 전승할 뜻을 품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칠조개의 출세간적 선택을 지지하고 축복한다는 의미에서 아낌없이 기뻐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