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양의 중의법

4편 이인(里仁) 제13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예법에 맞는 양위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법에 맞는 양위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어찌 예법을 따른다는 말인가?”


子曰: “能以禮讓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

자왈 능이예양위국호 하유 불능이예양위국 여예하



예양(禮讓)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예를 지켜 사양함”이라고 나옵니다. 외교용어로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관례(international comity)를 말합니다. 주희는 예의 형식인 예법과 그 정신인 겸양의 합성어로 풀이합니다. 대다수 주석서는 주희의 해석을 따릅니다. 통치 행위를 권력투쟁의 연장으로만 보지 말고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에 입각한 예법의 실천으로 바라보라는 해석입니다. 일반적 해석으로는 무리가 없습니다.


의아한 대목이 있긴 합니다. ‘논어’의 다른 구절에선 모두 한 글자 예(禮)로 표현한 것을 유독 이 장에서만 굳이 두 글자인 예양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또 두 차례에 걸쳐 예양이란 표현을 써놓고선 왜 마지막에 다시 예를 들고 나왔을까요? “평소엔 예를 따르면서 왜 예로써 다스리지 않느냐?”는 뜻이라면 굳이 예양과 예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공화주의적 관점에 서게 되면 파격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는 전통적인 예법, 예양은 ‘예법에 맞는 양위(讓位)’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예법에만 맞는다면 부자승계가 아니라 어진 사람을 찾아서 왕위를 물려줘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양위에 대한 예법은 이미 요순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됐으니 임금이 양위의 뜻을 밝힐 때 이를 세 차례 사양한 뒤 마지못한 듯 수락하는 것입니다.


함정도 있습니다. 이런 양위의 예법을 악용해 임금을 겁박해 선양(禪讓)하게 해 놓고선 시치미를 떼고 삼세번 사양의 제스처를 취해 왕위찬탈을 미화하는 권신(權臣)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부작용을 염려했기에 공자도 단순히 예라는 표현 대신 사양하는 마음을 강조한 예양을 썼다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중의적 포석이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군자학의 비의를 아는 이에겐 ‘예법에 맞는 양위’로, 모르는 이에겐 ‘예법과 겸양’이란 통상적 뜻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중해석을 겨냥했다는 해석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keyword
펭소아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32
매거진의 이전글시시포스, 루터, 니체 그리고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