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의의 병폐를 꿰뚫어 보다

4편 이인(里仁) 제12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이익에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자왈 방어리이행 다원



방(放)은 본디 시체를 걸어놓은 나무를 두들겨 사악한 영을 쫓는다는 벽사(辟邪)의 뜻을 지닌 한자였습니다. 그래서 ‘내쫓다, 물리치다, 추방하다, 놓다’는 뜻을 갖게 됐다고 일본의 한학자 시라카와 시즈카는 풀이합니다. 그러다 시체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이정표가 되는 나무라는 뜻이 강조되면서 ‘기준으로 삼다, 의거하다’는 뜻을 갖게 됐습니다. 또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본뜰 방(倣)’이 파생됐습니다.


원문의 방(放)은 방(倣)에 해당하니 방어리이행(放於利而行)은 행동의 준칙을 이익에 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행동의 결과로 이익이 예상될 때 자연계 생명체가 이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이해타산을 최우선시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문제 삼는 방어리(放於利)는 이해타산적 이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익이 된다면 부모형제도 팔고, 사랑과 우정도 배신하고, 사람들 뒤통수를 치는데 어찌 원망이 쌓이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보통사람들의 지도자가 될 군자의 행동기준이 타산적 이성에 머문다면 나라 곳곳에서 원망의 들불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의 영역이 방어리에 물들 경우 르상티망(ressentiment)의 정치(원한을 풀기 위한 보복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정치)를 초래하게 됩니다. 군자가 세속적 이해관계와 거리를 유지해야 이유입니다.


군자가 경계해야 할 이해타산적 이성은 2가지 차원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사익과 공익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군자도 사람인 이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개인적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충돌할 때 마땅히 후자를 우선해야 합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입니다. 그렇다고 개인적 이익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내세우는 일도 부자연스럽습니다. 멸사봉공을 말하는 지도자는 둘 중 하나입니다. 융통성 없이 원칙만 고집하는 원리주의자 아니면 뒤로 몰래 호박씨 까는 위군자, 곧 향원입니다.


둘째는 명분과 이익입니다. 타산적 이성에 입각해 이익만 탐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명분에만 집착해 공익을 외면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정치에 있어서 아무리 명분이 중요하다고 해도 백성의 살림살이를 어렵게 하고 경제활동을 위축시켜선 안 됩니다. 반대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이뮤만으로 파렴치한 짓을 벌여서도 안됩니다. 마땅히 공익을 추구하되 명분에 부합하는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공자의 이런 문제의식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시장논리에 입각한 이러한 이해타산적 이성을 유일이성으로 숭배하는 데 있습니다. 시장의 영역이 아닌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선 이런 이해타산적 이성이 제2, 제3의 지위로 물러나야 하는데 독점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 함에 따라 발생합니다. 이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사상이 신자유주의입니다. 공자의 표현을 빌리면 방어리(放於利)가 모든 영역의 행동기준이 되는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시장은 물론 정치와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도 원망이 넘쳐나는 병폐가 발생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물든 현대인들은 이런 공자의 비판이 불편하고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이익추구 자체를 불온시한 맹자와 주자의 중세적 해석을 공자사상으로 포장하고 시대착오적이라 비판합니다. 메시지를 희석하기 위해 메신저를 공격하면서 메신저에게 엉뚱한 허물을 뒤집어씌우는 허수아비 논법을 적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당한 비판입니다. 공자는 타산적 이성 자체를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할 타산적 이성이 공적 영역까 지배할 때 발생할 문제를 꿰뚫어 봤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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