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이인(里仁) 제14장
공자가 말했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가 주어졌을 때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자왈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내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테마는 ‘논어’에 6차례나 등장합니다. 모두 공자 본인의 발언입니다. 공자의 인정욕망이 그만큼 강렬했는지를 반증합니다. 그중 절반은 그만한 자격과 능력을 먼저 갖출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라는 14편 ‘헌문’ 제30장과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아파하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아파하진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已知也)”라는 15편 ‘위령공’ 제19장 그리고 바로 이 장입니다.
헌문 편과 위령공 편에선 불능(不能)과 무능(不能)을 걱정하고 아파합니다. 여기선 무위(無位)와 소이립(所以立)이 등장합니다. 무위는 지위가 없다는 뜻입니다. 소이립의 소이(所以)는 동사나 형용사 앞에 올 경우 ①이유/까닭과 ②수단/방법을 뜻합니다. 여기선 그 위치에 제대로 설 수단/방법을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의역하면 지위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그 지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나이 오십 이후의 공자는 경상의 지위에 올라 자신이 갈고닦은 군자학을 현실에 적용해 치국평천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모국인 노나라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상의 지위를 내어줄 군주를 찾아 13년에 걸쳐 천하주유를 했지만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역정에 비춰보면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빈말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좌절한 사람의 발언이기에 심금을 울리기도 합니다. 공자가 경상의 지위에 오르고자 한 것은 부귀영화를 탐해서가 아니라 군자학의 이론을 실천을 통해 검증받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진정 근심한 것은 경상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가 주어졌을 때 제대로 된 성과를 못하는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군자로서 경세제민을 성취하고픈 열망과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근심이 공자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열광과 근심이 동시에 물거품 되는 순간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공자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라고 한탄도 하고(14편 ‘헌문’ 제35장),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며 필생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무함을 토로하기도 합니다(9편 ‘자한’ 제17장).
진짜 감동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늘을 원망하는 것과 세상을 탓하는 것을 멈추고 다시 자기성찰의 사세로 돌아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원망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라고 일갈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번 생에선 이루지 못하더라도 어진 정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도를 익히고 덕을 쌓는 일에 더욱 매진하겠다 천명한 것입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공자의 이 발언이 감동적으로 다가서는 이유가 뭘까요? 끊임없이 밀어 올려도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바위덩어리 앞에서 좌절하는 법이 없는 시시포스의 불굴의 자세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마무를 심겠다”던 마틴 루터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운명을 오히려 사랑하라고 외친 니체의 역설적 태도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