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이인(里仁) 제6장
공자가 말했다. “나는 아직 어짊을 좋아하는 사람과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짊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사람은 어짊을 행함에 있어서 어질지 못한 것이 자신의 몸에 더해지지 못하게 한다. 단 하루라도 어짊에 자신의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나는 (그러기엔) 역부족이라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 그런 사람이 있을 테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子曰: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 好仁者無以尙之, 惡不仁者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자왈 아미견호인자오불인자 호인자무이상지 오불인자기위인의 불사불인자가호기신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유능일일용기력어인의호 아미견력부족자 개유지의 아미지견야
어짊은 세상이 돌아가는 객관적 법칙(도)과 타인을 포용하는 주관적 마음(덕)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공동체를 다스릴 때 객관적 도와 주관적 덕의 상호작용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국가운영의 차질이 발생하다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가뭄이나 홍수가 났을 때 객관적 자연법칙만 들먹이면 도탄에 빠진 민심을 다독일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민심 달래기에만 나섰다간 나라의 재정이 파탄 나고 백성은 자립심과 자율성을 잃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연이 균형을 회복하도록 시간을 벌면서 민심을 다독이고 한마음으로 단결하게 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괴력난신에 대해 말을 아꼈던 공자가 제사를 중시한 이유도 그것이 어짊의 실천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질지 못한 것(不仁)은 이렇게 도와 덕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크게 3가지 범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이 돌아가는 객관적 법칙에 어긋나는 짓을 벌이는 것(無道)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 일(不德)을 벌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둘의 조화에 어긋나는 일을 벌이는 것(無道不德)입니다.
어짊보다 어질지 못함에 해당하는 범주가 훨씬 더 많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짊을 지향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 이유입니다. 또 어짊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질지 못한 것이 자신의 몸에 들러붙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문제는 어짊을 좋아해 단 하루라도 거기에 온 힘을 쏟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구절입니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이나 어짊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짧으면 하루, 길어야 한 달 마음이 어짊에 이를까 말까인데”(6편 ‘옹야’ 제7장)와 상충되는 발언입니다. 이를 안연을 만나기 전 발언으로 공자가 아직 보지 못했다는 그런 사람을 안연이라고 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상황에 따라 또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공자 특유의 화법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어짊에 온 힘을 쏟는다는 것은 곧 도를 연마하는 학(學)과 덕을 쌓는 수(修) 그리고 도와 덕이 상충할 때 그 접합점을 찾는 사(思)에 심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놓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2편 ‘위정’ 15장)’와 궤를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군자학을 익히고 닦는데 전력을 기울이라고 채근한 발언으로 봐야 합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없는 것은 비단 어짊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온갖 볼거리가 실시간 디지털 정보로 제공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실천하려 하기보다는 하루에 단 얼마의 시간이라도 어짊에 대해 생각하고 그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대신해 봄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