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동네, 사느냐 만드느냐

4편 이인(里仁) 제1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어진 동네를 만드는 것은 아름답다. 처하는 곳이 어질지 않도록 놔둔다면 어찌 슬기롭다고 하겠는가?”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자왈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원문의 里仁爲美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어짊에 거하는 것이 아름답다”와 “동네 풍속이 인후한 것은 아름답다“입니다. 전자는 너무 추상적 선언에 가깝고 후자는 구체적이긴 하지만 너무 수동적입니다.


어짊은 결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분투를 통해서만 일궈지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이 작동하는 원리인 도를 깨쳐 그에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적 정리에 호소하는 덕에 부합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저는 이인위미를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개념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사는 동네부터 어진 동네로 일구는 것이야말로 수신의 덕과 치평의 도를 접목하는 출발점이 돼야 함을 일깨우는 표현으로 풀어내자는 것입니다.


이인위미를 이렇게 능동적 의미로 풀어내면 그 뒤로 이어지는 택불처인의 택의 능동성이 강화됩니다. 원문을 그대로 풀이하면 “어질지 않은 곳에 머물기를 택하는 사람은 슬기롭다 할 수 없다”가 됩니다. 하지만 능동성을 강조해 번역하면 “자신이 처하는 곳을 어질지 않게 놔두는 것은 슬기롭다고 할 수 없다”가 됩니다.


이런 해석은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물지 않는다(危邦不入, 亂邦不居)”고 한 공자의 발언(8편 ‘태백’ 제13장)과 상충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邦)와 동네(里)는 엄연히 다릅니다. 아무리 군자라 해도 나라님이 있는 나라를 좌지우지할 순 없습니다. 반면 자신이 사는 동네의 풍속을 어질게 가꾸지 못한다면 역시 군자라는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그렇기에 이인위미가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의 접합점이 되기에 아름답고 슬기롭다는 상찬의 대상이 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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