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충의 관계

3편 팔일(八佾) 제19장

by 펭소아

노정공이 물었다.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어찌해야 하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군주는 신하를 부릴 때는 예의를 갖춰야 하고, 신하가 군주를 섬길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定公問: “君事臣, 臣事君, 如之何?”

정공문 군사신 신사군 여지하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공자대왈 군사신이례 신사군이충



노정공은 노소공의 동생입니다. 형이 삼환세력을 제거하려다 외국으로 피신한 뒤 삼환 세력이 노나라 제후로 세운 인물입니다. 공자가 출사한 것이 바로 노정공 재위 기간의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중도(中都)라는 고을의 읍재가 됐다가 노정공 직할령의 범죄를 단속하고 형벌을 적용하는 법무장관(사구)으로 발탁되면서 하대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 장의 대화는 아마도 하대부로 발탁한 뒤 노정공과 공자 사이에 오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정공의 질문은 노나라 실권을 장악한 삼환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질문이란 해석이 있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엔 공자의 답이 원론적이란 점에서 과도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보다는 공자가 예에 정통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주와 신하 관계에 대한 기초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공자의 답은 사신이례(使臣以禮)와 사군이충(事君以忠)으로 이뤄집니다. 전자는 아랫사람이라고 싸잡아 함부로 대하지 말고 그 서열과 지위에 맞춰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후대의 통속적 해석처럼 “충성하라”는 뜻보다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정성을 다해 섬기라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논어’에서 충(忠)은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군이충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신라의 원광법사가 화랑을 위해 제정했다는 ‘세속오계’를 그 출전으로 꼽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어’의 이 구절을 차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원문의 사신이례가 빠져 있는 점에서 신하의 일방적 충성만 강조되는 착종을 유발한 것입니다.


공자의 답에 대해선 두 갈래 해석이 있습니다. “군주는 예를 갖춰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 섬긴다”는 병렬적 해석과 “군주가 예를 갖춰 부리면, 신하는 충으로 섬긴다”는 조건적 해석입니다. 병렬적 해석은 군주의 의무와 신하의 의무를 각각 독립적으로 본 것이니 군주가 군주답던 아니던 신하는 무조건 충으로 섬겨야 합니다. 반면 조건적 해석은 군주가 먼저 군주다워야 신하가 충성할 수 있다는 함의가 담겼으니 맹자의 역성혁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공자의 답은 그 둘을 모두 함축한다고 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병렬적 해석이 적용됩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나니(君君臣臣‧12편 ‘안연’ 제11장)” 군주는 신하를 부릴 때 예를 갖춰야 하고 신하는 군주를 섬김에 충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군주가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 심하면 조건적 해석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국가적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수로 쓴 고기를 대신에게 나눠주는 것이 예임에도 노정공이 공자에게 이를 보내지 않자 공자가 노나라를 박차고 떠난 것이 그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 신하의 처지에서 임금을 섬길 때는 일차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임금이 예의를 갖춰 응대하지 못함이 되풀이된다면 신하 또한 벼슬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무례함을 넘어서 무도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나라를 박차고 떠날 수 있습니다(危邦不入, 亂邦不居‧8편 ‘태백’ 제13장). 심지어 맹자가 강조한 것처럼 은탕왕이나 주무왕처럼 역성혁명까지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주의 예와 신하의 충은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인 중층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공자가 말하는 충은 일방적인 충성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이 신하를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과 신하가 임금을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은 병렬관계인 동시에 조건관계였습니다. 둘 중 하나가 어긋난다면 파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군신관계는 한국의 사극에서 보이는 군신관계보다는 영화 '왕과 나'에서 율 부리너와 데버러 카가 보여주는 관계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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