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예와 신하의 예

3편 팔일(八佾) 제18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첨하는 것이라 여긴다.”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자왈 사군진례 인이위첨야


앞서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예를 갖추고(使臣以禮),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事君以忠)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다시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는 예를 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이 예를 보이면 신하는 충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할 터인데 왜 새삼 예를 다해야 한다는 말을 꺼낸 것일까요?

예는 상호적입니다. 임금이 예를 갖추면 신하도 마땅히 예을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예를 갖추는 이례(以禮)와 예를 다하는 진례(盡禮)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임금은 적절히 예를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신하는 그 예를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살펴봤듯이 신하는 임금을 섬길 때 충(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忠은 양심에 부끄러움이 남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에게 예를 갖출 때도 마땅히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盡禮)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생각하는 충은 곧 진례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가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대청 위에서만 한다. 이는 교만한 것이니 대다수 사람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대청 아래서도 하는 것을 따르겠다”(9편 ‘자한’ 제3장)고 한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임금에게 인사할 때는 대청 아래서 먼저 일배(一拜)하고 대청 위로 올라가 재배(再拜)하는 것이 진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나라에서 제후에게 일배만 하는 것은 곧 신하 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삼환에게 일베 하는 것과 동등한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즉 제후나 삼환이나 일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제후에게 재배하는 진례의 원칙을 고수한 것입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삼환세력이 공자가 노나라 제후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것이라 험담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격은 사실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만한 발언입니다. 임금을 모심에 있어서 예를 다하지 않는 것(不盡禮)은 곧 불충(不忠) 한 것과 같다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군신관계는 상호적입니다. 그 상호성은 병렬적이거나 조건적일 수 있지만 결코 대등하지는 않습니다. 임금은 신하에게 예를 갖추는 것만으로 그 충을 살 수 있지만 신하는 뭘 하든 진력을 다해야 그에 부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비대칭성으로 인해 임금에게 아첨을 한다거나 과공비례(過恭非禮)의 비굴함을 보이는 것 또한 신하 된 자가 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양심의 거울에 비췄을 때 부끄러운 짓이니 결코 충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례’로 임금을 섬겼건만 임금이 ‘이례’를 망각하거나 무시한다면 파기될 수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례와 위첨(爲諂)을 분명히 구별하라는 메시지가 공자의 발언 속에 숨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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