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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자공과 비판적 공자

3편 팔일(八佾) 제17장

by 펭소아

자공이 매달 초 새 달의 시작을 태묘에 고하며 제사를 올리는 곡삭(告朔) 때 바치는 희생양을 없애고자 했다. 공자가 말했다. "단목사야, 너는 그 양을 아끼고, 나는 그 예를 아낀다."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욕거곡삭지희양. 자왈 사야 이애기양 아애기례



고대 중국에서는 한 해의 시작과 매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왕(천자)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였습니다. 하늘의 움직임을 읽고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존재가 천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자가 제국이란 공간뿐 아니라 시간의 지배자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천문과 역법을 통해 농사법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요임금 때부터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도 역법을 제정하는 것은 여전히 천자(주나라 왕)의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매해 섣달이 되면 천자가 다음 해의 달력을 제후국에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면 새해의 첫날과 매달 첫날 그 나라의 조상신을 모신 태묘에서 새 해의 시작과 새 달의 시작을 고하는 제의를 올렸습니다. 곡삭(告朔)은 이 제의를 말합니다.


원래는 제후가 대부 이상의 대신을 모두 거느리고 친히 참석해 조상신에게 직접 이를 알렸기에 告를 ‘아뢸 고’가 아니라 ‘뵙고 청할 곡’으로 새깁니다. 그러다 후대로 가면서 제후가 참석하지 않자 대신들도 빠진 채 제관들이 태묘에 희생양만 바치는 다소 맥 빠진 의전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상 '곡삭'이 아니라 '고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공이 노나라 또는 위나라 대부가 됐을 때 형식만 남은 이 곡삭에 희생양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려 한 것 같습니다. 공자는 이를 만류하며 “양을 아끼는 마음보다 예를 아끼는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라고 밝힌 것입니다.


여기서 곡삭이 새 해 첫날에 올리는 것이란 주장과 새 해 첫날뿐 아니라 매달 첫날에 올리는 것이란 주장이 엇갈립니다. 1년에 한 번이면 희생양도 한 마리, 1년에 12번이면 열두 마리가 필요합니다. 한 마리의 희생양을 두고 나눈 말이라면 자공의 도량이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열두 마리의 희생양을 두고 나눈 말이라면 공자의 원칙론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와 관련 10편 ‘향당’ 제4장을 보면 공자가 ‘길월(吉月)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길월은 매달 초하루를 말하는데 특별한 일이 없어도 대신들이 조정에 모여 제후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는 대조(大朝)가 열렸습니다.


매달 초 곡삭을 마친 뒤 대조가 열렸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러다 제후가 곡삭에 참석하지 않자 삼환과 같은 권신(權臣)도 덩달아 대조에 빠지게 된 듯합니다. 공자가 대조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것은 곡삭에도 빠짐없이 참여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공은 이재에 밝고 실용적인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제후와 대신이 참여하지 않는데 매달 곡삭에 양 한 마리씩 바치는 것을 낭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럼 공자는 옛 제도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이어서 옛 것을 그대로 지키고자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공자는 언행일치를 추구한 정명(正名)주의자였습니다. 이름과 실체가 일치할 때 말이 힘을 얻고 일이 이뤄져 예악 정치가 비로소 꽃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13편 ‘자로’ 제3장). 그에 따르면 곡삭이란 이름에 부합하려면 제후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대조라는 이름에 부합하려면 대신이 빠짐없이 참석해야 합니다. 헌데 노나라 현실정치에선 이름과 실체가 따로 놀고 있던 것입니다.


공자의 ‘정자정야(政者正也)’ 테마에 따르면 이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의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하지만 자공은 삼환세력이 제후보다 막강해지면서 실체를 왜곡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것을 현실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공자는 그것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임시응변책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현실에선 이를 대놓고 말할 순 없었기에 “자공, 너는 양을 아끼지만 나는 예를 아낀다”는 말로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의 발언은 국가 재정을 낭비해서라도 옛날부터 내려온 예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분과 실천이 어긋나 있을 때 비판적 의식을 갖고 문제의 본지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뭐가 본질적 문제이고 뭐가 부수적 문제인지를 가려서 본질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수적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면 오히려 왜곡된 현실을 합리화시켜 주는 결과만 초래한다는 것을 일꺠워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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