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일기(2020년 9월 12일 비)
우민은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유명인사가 남긴 명언이라는 걸 발견할 때가 있다. 우민이 원래 알고 있던 명언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출처를 검증하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근거 없이 유명인사의 이름을 도용하는 명언이 많아져서다.
우민은 얼마 전 문재인 정부가 "중산층을 세금과 인플레이션의 맷돌로 으깨버리라"라는 레닌의 말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중이라는 글이 유행하는 걸 봤다. 과연 레닌이 그런 말을 했을까 의아해하던 중 그것이 엉터리 인용문임을 추적한 글을 만났다.
레닌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화폐가치의 하락이 자본주의 붕괴의 신호탄'이란 취지의 발언을 했을 뿐이다. 이를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간접 인용문으로 소개했는데 1970년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레닌의 직접 인용문으로 바꿨다. 그걸 다시 1997년 반공주의자임이 분명한 누군가가 '인플레이션은 노동자 계급을 으깨버리는 맷돌'이라는 미국 사회주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발언을 끌어오면서 세금까지 갖다 붙여 레닌의 발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우민은 그 전에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Life is C between B and D)'라는 말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발언이라며 떠도는 걸 봤다. 거기서 B는 탄생을 뜻하는 Birth, D는 죽음을 뜻하는 Death, C는 Choice를 뜻한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과연 저 말을 했을까?
프랑스어로 Birth는 Naissance, Death는 Mort, Choice는 Choix다. 프랑스어로 했다면 ‘N과 M 사이의 C’가 되고 만다. 알파벳 어순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공산주의자에 미국을 엄청 싫어했던 사르트르가 설마 영어로 저 말을 했을까? 몹시 의심이 갔다.
구글로 검색해보면 대략 2010년 이후 저 표현이 사르트르의 발언으로 둔갑해 등장한다. 그 전에는 저 발언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기가 없다. 사르트르 전공자 중 한 명은 사르트르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엉터리 인용이라고 단정했다.
우민은 저 비슷한 말을 한 프랑스 철학자를 알고 있다. 사르트르와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에로티시즘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다. 그는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자궁에서 태어나는데 그것이 오줌을 누는 요도구와 똥을 누는 항문 사이에 위치하는 것을 절묘하게 포착한 것이다. 인간이란 성과 속 사이에 위치한 아이러니한 존재임을 각성시킨 발언이다.
아마도 누군가 바타이유의 이 표현이 너무 민망해 고심하다가 그보다 우아한 표현을 생각해낸 게 아닐까? 굳이 저 표현에 맞는 철학자를 고르라면 우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칼 포퍼를 고를 것이다.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던 포퍼는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발언이냐가 그 발언에 힘을 실어두는 게 아니다. 정확한 출처나 발언자를 모르면 그냥 이런 말이 있는데 참 공감이 가더라고 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굳이 그 표현에 권위를 갖다 붙이기 위해 억지로 유명인사를 끌어대는 건 우민이 극도로 싫어하는 '사대주의'다. 사대주의는 단순히 중국과 같은 강대국 편에 서야 살아남는다는 정치외교용어만이 아니다. 힘이 있고 대세가 된 누군가에 빌붙어 살겠다는 인생의 태도를 지칭한다.
근거 없는 출처를 갖다 대서라도 유식해보려는 당신은 혹시 지적인 사대주의자 아닐까?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또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