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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Oct 12. 2023

시와 정치

3편 팔일(八佾) 제8장

  자하가 물었다. “‘어여쁜 미소에 오목한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매에 또렷한 흑백의 눈동자여, 흰 바탕으로 찬란함을 이뤘도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먼저 바탕그림을 그린 뒤 색칠을 한다는 뜻이다.”

  자하가 "예가 나중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나를 흔들어 깨워주는 사람이 복상(자하)이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구나."    

  

  子夏問: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자왈    회사후소

  曰: "禮後乎?" 

  왈   예후호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왈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


     

  자하는 공문십철 중 자유와 더불어 문학(文學)에 일가견이 있다고 인정받은 제자입니다. 여기서 문학은 오늘날처럼 시문(詩文)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악(禮樂)의 전거가 되는 고문(古文)과 역사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고전학에 더 가깝습니다. 공자가 말한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8편 ‘태백’ 제8장)이 문학에 응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예악(詩禮樂)은 공자가 가장 애정한 3종 세트였습니다. 따라서 문학의 열매와도 같았던 자하 또한 공자가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자하가 공자가 애정하는 ‘시경’에도 수록된 시를 읊으며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질문하니 공자가 어찌 흐뭇하게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가르침을 받은 뒤 공자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냅니다. 후대의 맹자가 말한 ‘군자삼락’의 세 번째 즐거움, 곧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 따로 없는 셈입니다. 

    

  사제 간의 이 흐뭇한 대화에 등장하는 시의 첫 두 구절은 ‘시경’ 위풍(衛風) 편에 실린 ‘석인(碩人)’이란 시에 똑같이 등장합니다. 제2연의 마지막 두 행에 해당합니다. 碩人은 키 큰 사람이란 뜻과 덕이 높고 큰 사람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는데 시의 제목은 늘씬한 미인과 덕이 높은 여인이란 뜻을 함께 함축합니다.   

  

  ‘석인’ 1연에는 그 여인의 출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제나라 제후의 딸로 위(衛)나라 제후에게 시집왔으며 형(邢)나라 제후와 담(譚)나라 제후의 처제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에 부합하는 여성이 있었으니 기원전 8세기초 위나라 제후인 위장공(衛壯公)의 부인인 장강(壯姜)입니다.

     

  장강은 외모뿐 아니라 마음씨도 고왔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위장공은 이를 빌미로 후사를 얻기 위해서라며 여색에 빠져 지내느라 정사를 멀리합니다. 제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장강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낀 위나라 백성들이 지어서 부른 노래가 바로 ‘석인’입니다. 가사만 놓고 보면 미인에 대한 찬가로 보이지만 무능한 군주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시경'에 실려있는 무수한 사랑노래의 배후에도 이러한 정치적 비판의식이 깔려있을 수 있다는 복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명이 복상(卜商)인 자하는 자공가 마찬가지로 바로 그 위나라 출신이란 점에서 ‘석인’이란 시에 정통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시의 심층적 의미를 스승에게 묻습니다. 알면서도 다시 물어 확인받는 것이 예라며 ‘시례야(是禮也)’를 외쳤던 ‘팔일’ 편 제15장의 내용을 떠오르게 합니다. 

    

  자하가 인용한 시 구절부터 분석해 봅시다. 원문의 천(倩)은 보조개가 생긴다는 것을  뜻하고, 반(盼)은 검은자위와 흰자위 구별이 또렷하다는 의미입니다. 현(絢)은 광채가 난다, 눈부시다는 뜻입니다.      


  ‘석인’에도 등장하는 앞 두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어여쁜 미소를 지녔는데 오목한 보조개까지 더해졌고, 이미 아름다운 눈매를 지녔는데 흑백 구별이 또렷한 눈동자까지 갖춰 매력이 배가됐다는 뜻입니다.

      

  이를 토대로 ‘석인’에는 없는 세 번째 구절(素以爲絢兮)을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그 구조를 보면 어여쁜 미소(巧笑)와 아름다운 눈매(美目)가 흰 바탕(素)과 대구를 이루고, 보조개가 생기는 것(倩)과 눈동자의 흑백구별이 또렷한 것(盼)이 찬란함을 이루는 것(爲絢)과 대구를 이룹니다.  

    

  소(素)는 실타래의 뭉치 부위를 쥐고 실타래를 물감통에 넣어 염색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이때 다른 부위는 모두 염색이 디지만 손잡이에 해당하는 뭉치 부위만 흰색으로 남게 되기에 ‘희다’와 ‘본바탕’이란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素以爲絢兮은 ‘흰색이 먼저이고 채색이 다음이다’ 또는 ‘본바탕 위에 다시 찬란함을 더하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공자가 그 뜻을 풀어낸 ‘회사후소(繪事後素)’에 대해선 크게 두 갈래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먼저 색칠을 하고 난 뒤 그 여백을 흰색으로 마무리한다’입니다. 후한의 유학자 정현(鄭玄)이 풀이입니다. 두 번째는 ‘채색할 흰 바탕을 먼저 마련하고 채색을 한다’입니다. 송대 주희의 해석입니다.  

    

  정현의 해석보다 주희의 해석이 시문의 구조적 분석에 맞아 떨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그림 그리기에 비유한 것이기에 ‘먼저 바탕그림을 그린 뒤 채색을 한다’로 풀이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일반적으로 희미하게 바탕그림을 그려놓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점을 반영한 풀이입니다.  

    

  자하는 그 순간 불현듯 깨달음을 얻습니다. 미소와 보조개, 눈매와 또렷한 눈동자, 바탕그림과 채색의 유비(類比)가 어짊(仁)과 예(禮)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어짊이 바탕그림이라면 예가 찬란한 색채인 것입니다. 리쩌허우의 표현을 빌리면 “어짊은 인성(人性)이고 예는 인문(人文)인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문이란 형식이 없다면 인성이란 본성이 제대로 발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문이 진정한 빛을 발하려면 반드시 인성이란 바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공자 화답은 두 갈래로 구성됩니다. “起予者, 商也”와 “始可與言詩已矣”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전자에 대해 공자도 깨닫지 못한 것을 자하가 깨우쳐 줬다는 풀이는 과도합니다. 그보다는 공자가 이미 깨닫고 있던 것을 자하가 새롭게 일깨워줬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복상, 너로구나”나 풀이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문의 기(起)는 흥어시(興於詩)의 흥(興)과 공명합니다. 둘 다 ‘일어나게 하다’ 내지 ‘격동시킨다’는 뜻을 같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공자는 시문이 새로운 사유의 흥취를 불어 일으킨다는 취지에서 평소 자주 말해왔던 ‘흥어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더욱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비로소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구나”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시와 예악과 어짊이란 정치의 절묘한 결합입니다. 물론 그것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이뤄집니다. 한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를 찬미한 시 구절에서 국가운영의 원칙인 예와 통치철학인 어짊에 대한 통찰이 길어지는 것이 한 방향성을 이룹니다. 반대로 위장공이란 최고통치자에 대한 정치적 비판의식이 장강이란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로 표출되는 역방향성도 발견됩니다. ‘시경’의 문학과 ‘논어’의 정치를 그렇게 결합시키는 촉매가 바로 공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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