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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Oct 21. 2023

왕 없는 나라 상상한 공자

3편 팔일(八佾) 제5장

  공자가 말했다. “야만의 땅에 군주가 나타났다 해도 문명의 땅에 군주가 없는 것만 못하다.”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자왈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무야     



  이 장에 대한 전총적 해석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오랑캐의 나라에도 군주가 있는데 어찌 중원에는 군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한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랑캐 나라에 강력한 군주가 있다 해도 중원 땅에 군주가 없는 정치상황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전자가 주나라 왕이 있지만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탄식이라면 후자는 오랑캐 땅에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해도 중원의 문명질서에 못 미친다는 자신감의 발포라 할 수 있습니다. 대조적 해석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엔 정상적 국가라면 반드시 왕이 있어야 한다는 왕당파적 사고가 깔려있습니다. 

    

  저는 21세기적 상황에 맞춰 이와 달리 공화주의적 해석을 가미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임금에 의해 통일된 오랑캐나라보다 임금이 없이 여러 제후가 분할 통치하는 중화제국이 더 낫다”는 해석입니다.   

        

  공자가 생각한 어진 정치는 혈통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는 나라가 아니라 혈통에 상관없이 도와 덕을 갖춘 이가 최고 통치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과연 그런 나라가 존재할까요? 공자는 요순시대 중국에서 그 모델을 찾았습니다만 주나라 때에도 그런 통치가 이뤄진 시대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간 이어진 공화(共和) 시대입니다. 주나라 여왕(厲王)이 폭정을 일삼다가 백성들에 의해 쫓겨난 뒤 그가 죽고 그 아들인 선왕(宣王)이 즉위할 때까지 14년간 왕좌를 비워둔 채 여러 신하들의 합의에 의한 통치가 이뤄진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를 공화기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 ‘사기’는 여왕의 신하였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평화를 위해 공통 통치했다고 설명합니다. 황제(黃帝) 때부터 전국시대 위양왕(魏襄王) 시대까지 연도별 주요 사건을 죽간에 기록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따르면 공(共)나라 백작 화(和), 즉 공백 화(共伯和)에 의해 다스려져서라고 설명합니다. 

    

  근세 일본인들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귀족과 의원에 의한 합의로 국정이 운영된 유럽의 ‘res publica’라는 정치체제를 지칭하기 위해 이 시대 명칭을 끌고 왔습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공화국과 공화주의의 어원이 된 것입니다. 

    

  공자가 편찬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기록물 중에 공화나 공화기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자가 생각했던 좋은 정치, 어진 정치가 서구 공화주의와 공명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후대 유학자들은 공자의 어진 정치를 임금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임명한 현명한 재상에 의해 이뤄지는 재상정치로 풀어냈습니다. 왕이란 존재를 만고불변의 항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왕이 항수가 아니라 변수라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면 재상정치는 공화정치로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해집니다. ‘군주 없는 제하(諸夏之亡)’라는 공자의 표현에서 그런 불온한 상상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면 얼토당토않은 과장일까요?  

   

  물론 공자사상에는 최고 지도자를 민주적으로 선출하고 임기를 제한한다는 현대 공화주의의 핵심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왕이 될 어진 사람을 제상으로 발탁해 국가운영을 맡겨본 뒤 검증이 끝나면 왕위를 물려준다는 핵심 내용은 플라톤의 철인왕 사상과 공화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철인왕 사상은 백성 중에 가장 현명한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중우정치로 흐를 수 있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공화주의는 군주정(대통령) 귀족정(의회) 민주정(다수결의 원칙)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한 정치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 정치체제의 장단점을 비교한 플라톤 사상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공화주의는 공과 사를 구별하면서 ‘공공의 것(res publica)’을 최우선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군자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4편 ‘이인’ 제16장), “공직에 임할 때는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고 보수는 그 다음이다”(15편 ‘위령공’ 제38장),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라”(16편 ‘계씨’ 제10장)가 모두 그에 해당합니다. 

     

  공화국의 구성원은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고 대등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통치자가 될 수 없기에 피치자의 의무로서 자발적 복종을 이행해야 하지만 그 또한 통치자가 될 수 있기에 피치자를 동료시민으로 예우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자의 군자학에 담긴 예치(禮治)의 사상에서 그런 공화주의적 사상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치사상은 군주와 신하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하는 예에 기반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직급에 맞춰 신하를 예우해해야 하고. 신하는 정성을 다해 왕을 섬기되 그에 걸맞은 예우를 못 받으면 떠나갈 수 있습니다. 또 군주와 핏줄을 ㄴ나눈 사람 또는 공신의 자제만이 신하가 될 수 있었던 관행을 끊어내고 일반 백성을 포함해 누구든 치평의 도을 익히고 수제의 덕을 쌓으며 공동체 통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이적(夷狄)은 이런 예치가 이뤄지는 문명질서의 울타리 밖 야만의 세계를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설사 그런 공간에 왕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군주와 신하가 서로를 존중하는 예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라는 주종관계로 엮인 곳을 말합니다. 그런 오랑캐의 공간에서는 문덕(文德)으로서 상대를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력과 강압을 통한 복종이 강요됩니다. 

     

  반대로 공자가 말하는 제하(諸夏)는 에치와 문덕으로 다스려지는 문명질서의 세계를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군주와 신하가 상호 존중하는 예로 맺어지고 명분과 윤리가 물리적 힘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공간입니다. 

     

  여기서 제하와 이적을 중원과 오랑캐라는 당대의 구체적 현실을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춘추시대 중원의 여러 제후국 중에서 예치와 문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됐단 말입니까? 중화문명권과 그 문명권 밖의 지역을 지칭하는 당대의 입말을 빌리긴 했지만 공자는 여기서 그런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으로 썼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오랑캐 땅에 있더라도 예치와 문덕이 실현되면 제하에 속하고 중원 땅에 잇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면 이적에 속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숨어 있다고. 지리적으로 이적의 땅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게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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