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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Oct 26. 2023

예의 뿌리와 가지

3편 팔일(八佾) 제4장

  임방이 예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크나큰 질문이로군요!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좋고, 상사는 무난하게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비탄에 빠지는 것이 좋습니다.”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임방문례지본    자왈   대재문  예여기사야   영검   상여기이야  영척



  임방은 공문의 제자라는 설과 공자와 동년배의 예 전문가라는 설이 엇갈립니다. 태산에 오래 거주했으며 태산의 산신령과 비교될 정도의 인물이라면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년의 공자가 태산을 찾았다가 그 터줏대감이던 임방을 만나 예에 대한 고담준론을 펼치는 가운데 등장한 발언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임방의 질문을 들은 공자는 “크나큰 질문”이라며 감탄하는데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는 임방의 겸손한 자세에 감탄한 것입니다. 노나라 태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모든 걸 일일이 묻고 확인하던 공자를 비아냥대는 소리에 대해 “이게 바로 예(是禮也)”라고 했던 장면(팔일 편 제15장)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설사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묻고 확인하는 것이 예의 기본임을 강조한 공자를 흡족하게 하는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단순히 예에 대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의 뿌리, 곧 근본을 파고드는 심층적 질문을 던진 점입니다. 본(本)의 반대는 말(末)입니다. 나무의 중심을 차지하는 뿌리와 거기서 뻗어나간 곁가지를 말합니다. 본은 핵심이요, 말은 수식(修飾)입니다. 하지만 말이 있어야 본이 풍성해집니다. 나무가 튼튼한 것은 뿌리 때문이지만 동시에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가지 때문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따라서 임방의 질문은 무엇이 예의 본이고 무엇이 예의 말인지 구별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에 대해 예의 본은 검소(儉)에 있고 예의 말은 사치(奢)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는 화려한 겉치레보다 소박한 진솔함을 중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  예의 핵심을 구성하는 상례의 경우엔 본이 슬퍼함(戚)이고 말이 무난함(易)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원문의 易의 풀이를 두고 ‘평온하게 치르다’와 ‘형식적으로 치르다’가 팽팽히 맞섭니다. 부질 없습니다. 윤동주의 시 ‘쉽게 씌어진 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치르는 상례’라는 소리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상례를 차질 없이 무난하게 치르는 것보다는 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치르는 것이 예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는 뜻입니다.  

   

  주의할 대목이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만 있을 수 없고 잔가지도 있어야 하듯 예 또한 진솔함과 애절함만 있어선 안 됩니다. 화려함과 무난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적절히 녹아있는 장엄함과 절제된 슬픔으로 표출될 때 비로소 예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망각하면 공자가 말한 예는 원초적 감정의 분출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공자가 생각한 예는 그 원초적 감정을 절제되면서도 세련된 양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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