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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Nov 09. 2023

군자학의 구심력과 원심력

3편 팔일(八佾) 제1장

  공자가 계씨에 대해 말했다. “제 집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하는 것, 이러한 짓을 저지르는데 뭔 짓인들 못 저지르겠는가?”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일무(佾舞)는 세로와 가로로 서는 무용수의 숫자를 동일하게 맞춰 군무를 추는 제례무를 말합니다. 가로 여덟 줄, 세로 여덟 줄 도합 64명이 군무를 추는 팔일무는 왕(천자)이 행차할 때의 일무를 말합니다. 제후는 여섯 줄씩 36명이 추는 육일무, 대부는 네 줄씩 16명이 추는 사일무, 사(士)는 두 줄씩 4명이 추는 이일무로 그 행차를 알렸습니다. 

     

  조선시대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치르는 종묘제례와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서 치르는 문묘제례(석전대제)에도 일무가 등장합니다. 조선 임금은 제후에 해당했기에 종묘제례에선 육일무가 펼쳐졌고, 공자는 당나라 때 문성왕(文宣王)으로 추증됐는데 춘추전국시대 왕은 곧 천자라 하여 팔일무가 펼쳐졌습니다. 요즘 종묘제례에선 조선의 고종이 융희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하여 육일무가 아닌 팔일무를 춥니다.  

    

  노나라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제후국입니다. 그 제후에겐 육일무, 대부에겐 사일무만 허용돼야 합니다. 하지만 주나라 건국과 중흥에 공이 큰 주공(周公)에게 봉해진 나라이기에 주나라 2대 왕인 주성왕 때부터 노나라 공실에게 천자국에 준하는 의례를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노나라 제후에겐 팔일무, 삼환 가문을 필두로 하는 대부에겐 육일무가 허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헌데 계손씨 가문에선 집안 행사에서 팔일무를 추게 했으니 천자는 물론 제후까지 무시한 처사입니다. 

    

  원문의 계씨를 두고 계평자(계손의여), 계환자(계손사), 계강자(계손비) 중 누구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됐든 팔일무를 추기 시작하면 그 후손도 대대손손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냥 계손 씨 가문에서 벌인 짓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계손 씨 가문의 참월(僭越)에 대해 공자는 “이런 짓을 감행할 수 있으면 뭔 짓인들 못하랴”라는 촌철살인의 논평을 남깁니다. 이는 마치 예언처럼 현실이 되고 맙니다. 계환자는 주군인 노소공(희야)을 국외로 축출하고 노소공의 동생을 꼭두각시 제후로 올리니 바로 노정공(노송)입니다. 또 계강자가 죽었을 때는 노정공의 아들인 노애공(희장)이 스스로를 계강자보다 낮췄다가 그 굴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월나라의 힘을 빌려 삼환세력을 축출하려다 결국 망명군주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기원전 256년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공을 받아 결국 멸망하자 계손 씨 가문은 자신들의 영지에 비(費)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제후가 됩니다.     


  ‘팔일’ 편은 이렇듯 유독 예악에 대한 내용으로 일이관지 한다는 점에서 다른 편과 차별성을 띱니다. 공자가 생각한 예악은 어짊의 정치 원리를 제도화한 것인 동시에 주나라가 표방한 문덕(文德), 곧 합리적 방식으로 평화를 관철하는 정치적 태도를 일상화한 것입니다.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표현에 함축돼 있듯이 문덕이 그러한 정치사상의 확장을 담당한다면 예악은 그러한 정치사상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단속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악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답답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드시 문덕과 함께 예악을 읽어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를 다시 뒤집어 말하면 군자학에 구심력을 부여하는 것이 예악이라면 군자학을 확산시키는 원심력으로 작동하는 것이 문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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