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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Nov 22. 2023

공자가 효를 강조한 이유

2편 위정(爲政) 제21장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정치를 하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서경’에 ‘효로구나! 효성스러우면 형제에게 우애를 베푸나니, 정치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찌 벼슬하는 것만이 정치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혹위공자왈   자해불위정

  子曰: “書云: ‘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자왈   서운    효호  유효  우우형제   시어유정   시역위정   해기위위정          

  


  2편의 제목이기도 한 위정(爲政)은 ‘정치를 하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공자에게 왜 위정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위정은  벼슬길에 나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공자는 ‘서경’ 군진(君陳) 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서경 58편은 한나라 때 예서로 쓰인 금문상서 33편과 선진시대 과두문자로 작성된 고문상서 25편을 합친 내용입니다. 서체는 옛 것이지만 후대에 발견된 고문상서에 대해선 공자시대가 아니라 그 뒤에 가필된 위문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 서경은 금문상서 위주로 하되 빠진 내용만 고문상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군진 편은 고문상서에 실린 내용입니다. 주나라 성왕이 주공(희단)이 숨진 뒤 그 뒤를 이어 수도 호경의 동쪽 지역 통치를 위해 세워진 성주(낙읍)를 다스리게 한 군진(주공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음)에게 당부하는 발언이 담겼습니다. 현재의 서경에 실린 내용은 여기서 인용된 표현과 살짝 차이가 있습니다. ‘군진아! 오직 그대의 아름다운 덕은 효성스럽고 공손한 것이니, 효성스러워야 형제에게 우애를 베푸나니 이는 능히 정치를 베푸는 것에도 적용된다(君陳! 惟爾令德孝恭, 惟孝, 友于兄弟, 克施有政)’입니다.


  공자 발언 속 ‘시어여중(施於有政)’이 서경에는 ‘극시유정(克施有政)’으로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극(克)은 동사일 경우 ‘같다’는 뜻이고 부사일 경우엔 ‘능히’나 ‘잘’을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성왕의 발언은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알면 형제에게도 우애를 베푸나니 이는 정치를 베푸는 데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경’의 표현은 철저히 왕 중심입니다. 정치를 백성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관점은 물론이고 부모에게 효성하는 마음으로 왕에게 충성하고 형제에게 우애를 베푸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된다는 논리 또한 그렇습니다. 공자는 이를 백성의 관점에서 뒤집습니다. 굳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면 그 역시 정치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위정에 참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이 같은 표현은 왕조시대엔 매우 도발적 내용입니다. 사실 성왕이 군진을 발탁한 것은 그가 주공의 아들이란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마치 자신이 군진을 발탁한 듯 생색내기 위해 효도와 우애를 끌고 온 것에 불과합니다. 발칙하게도 공자는 이를 원용해 ‘효도와 우애를 열심히 실천하는 나 같은 사람을 왜 발탁하지 않느냐?’고 당대의 정치를 힐난한 셈입니다.

    

  공자의 위대함은 이러한 현실비판에 멈추지 않고 이를 정치의 일반원리로 전환시킨 점입니다. 왕조정치에서 모범으로 삼는 선왕의 발언을 통치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통치자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좋은 정치의 기준으로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지 못하는 왕 또는 고관은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벼슬길에 나서지 않더라도 효도와 우애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는 발언에는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숨어 있습니다. 왕조국가에서 정치에 참여하려면 왕에게 잘 보여 입조(入朝)해야 가능합니다. 헌데 공자의 발언을 통해 입조 하지 않아도, 즉 왕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공자를 통해 비로소 ‘왕에게서 자유로운 정치’의 문이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런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모르거나 모른 척합니다. 그래서 이 장의 내용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연장선으로 풀어내고 맙니다. 진일보했다 해도 일가(一家)의 운영원리와 국가(國家)의 운영원리를 동일시한 한계가 있다는 비판에만 머물고 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수진제가는 덕에 연결되고 치국평천하는 도에 연결됩니다. 둘을 함께 갖춰야 어진 정치(仁政)가 실현된다고 했지 그 둘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 주석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공자는 효자였나요?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을 세 살 때 여의었고, 어머니 안징재는 열일곱 살 때 여의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자가 효의 중요성을 한참 설파하고 다닐 무렵 공자는 효성스럽게 모실 부모 자체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공자가 효성스러웠다는 일화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럼 그 자신은 결코 효자라 할 수 없음에도 공자는 왜 그토록 효를 강조한 걸까요? 효자의 심성이 덕의 주요 요소라 생각한 것이 컸을 것입니다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군자학이 모델로 삼는 옛 성현 중에 효자가 많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현실 정치에서 패악을 저지르는 당대의 통치자들에게 어진 정치를 실현하라고 압박하는데 효만큼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효자입니까? 아 효자가 아니시라고요 그럼 왕 자격이 없으니 효자로 거듭나세요”라고 주문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군진 편에서 엿보이듯 효는 임금의 덕목이 아니라 신하의 덕목이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니 나라의 부모인 임금에게도 충성을 다하겠구나, 기특하다”는 탑다운(top-down)의 시선이 녹아 있습니다. 공자는 이를 뒤집어 백성이 왕에게 요구하는 바텀업(bottom-up)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덕목으로 바꾼 것입니다.   

   

  유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만들고자 했던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간과하거나 아니면 은폐하기 바빴습니다. 그리하여 유학은 공자가 창학한 유학과 달리 군신과 부자, 부부간의 수식적 서열의식을 앞세우고 강조하는 꼰대의 학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참고로 군진 편에는 “비유하면 그대는 바람이고, 저 아래 백성은 풀이다(爾惟風, 下民惟草)”라는 발언이 등장합니다. 이는 ‘논어’ 12편 안연 제19장에 등장하는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이라는 공자의 발언과 궤를 같이합니다. 바람이 불면 풀이 그 방향으로 쓸리듯 통치자가 명하면 백성은 바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백성의 뜻을 헤아려 정치를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지나간 뒤 풀이 먼저 일어서듯 반드시 반발을 부르게 됨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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