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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Dec 04. 2023

배움이 사색보다 먼저인 이유

2편 위정(爲政) 제15장

  공자가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아둔해지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움(學)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책을 읽어서 새롭고 낯선 것을 접하는 것입니다. 사색(思)은 그렇게 접하게 된 새롭고 낯선 것을 익히고 삭혀서 자신의 언어로 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움이 내 밖에 있는 객관적 대상을 내 안으로 수용하는 것이라면 사색은 일단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을 반추하고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입식 교육받은 내용을 딸딸 외우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툭 치면 탁하고 바로 답이 나오게 하는 것까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질문이 조금만 바뀌어도 답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맥락에서 응용하는 것 역시 어렵게 됩니다.  

    

  원문의 망(罔)은 그런 상태를 지칭하는 형용사입니다. 이 경우, 없다와 어둡다 둘 다 가능합니다. 없다고 새기면 그렇게 배워봤자 말짱 도루묵이란 소리입니다. 어둡다로 새기면 그렇게 배운 걸로 발등 앞만 비칠 수 있지 더 멀리, 더 자세히 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두 갈래 뜻을 함축하는 의미로 “아둔해진다”로 풀어봤습니다.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정보를 차단한 채 주관적 판단에만 의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심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부에서 새로운 정보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기에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설사 뭔가에 대해 안다고 할지라도 자폐적 지식에 머물고 맙니다. 

    

  원문의 태(殆)는 형용사로 쓰일 경우 위태롭다, 피곤하다, 의심스럽다, 게으르다, 비슷하다 등등의 여러 뜻이 있습니다. 문맥상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색의 내부 내부회로만 돌게 되면 외부 비판에 쉬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통적 해석을 쫓아 “위태로워진다”로 새겨봅니다. 

    

  그렇다면 배움과 사색은 동등한 가치를 지닐까요? 아닙니다. 15편 ‘위령공’ 제31장에서 공자는 “내 일찍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자지 않으며 사색만 한 일이 있었지만 유익함이 없었으니 배우는 것만 못하였느니라”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움이 먼저고 사색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고 새기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배움을 사색보다 더 중시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위한 배움과 사색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군자학의 관점에서 답한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객관적 세계법칙으로서 도를 터득하기 위함입니다. 객관적 세계법칙을 터득하기 위해선 주관적 판단보다는 객관적 세계 이해가 선행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내 밖에 있는 객관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학이 먼저고 이어 그것을 주관적으로 소화해 내는 사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장의 표현을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독일철학자 간트와 비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관은 객관적 세계(물자체)에 대한 감각적이고 경험적 이해를 말하니 공자의 학과 연결됩니다. 개념은 그런 감각적 경험을 일반적 지식으로 관념화한 것을 말하니 공자의 사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의 내용을 “사색 없는 배움은 맹목이고, 배움 없는 사색은 공허하다”라고 풀어내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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