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위정(爲政) 제3장
공자가 말했다. “행정으로 길을 열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은 모면하려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덕으로 길을 열고, 예로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사람다움을 갖추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법가의 정형지치(政刑之治)와 유가의 덕례지치(德禮之治)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구절로 풀이됩니다. 문제는 정작 공자 시대에는 법가와 유가의 분리 자체가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법가는 공자보다 100년 뒤 인물인 상앙을 통해 꽃을 피웁니다. 그런 법가 사상의 씨앗이 공자사상에서 싹텄을 가능성을 우리는 ‘법가의 원류, 공자’(13편 ‘자로’ 제3장)와 ‘공자와 상앙의 결정적 차이’(12편 ‘안연’ 제7장)에서 살펴봤습니다.
공자는 위정자의 명실상부와 언행일치를 통해 국가의 질서와 조화(예악)를 끌어내고 다시 이를 토대로 공정한 형벌의 실현이 이뤄진다고 봤습니다. 법가는 이를 역순으로 적용한 것이니 '형벌을 공명정대하게 집행하면 국가와 사회에 질서와 조화가 깃들게 되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위정자의 말에 권위가 실리게 된다. 그에 따라 국가 차원의 정책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사상의 순류(順流)가 유가라면 역류(逆流)가 법가인 것입니다.
또 공자는 정치의 3가지 요소로 민생(足食), 국방(足兵), 민심(民信)을 꼽으며 그 중요성을 역순으로 꼽았습니다. 법가는 공자가 말한 역순으로 그 셋을 성취합니다. 다만 공자가 겨냥한 민심이 교화를 통해 감화되는 마음이라면 법가가 겨냥한 민심은 공포심과 이기심에 의해 길들여지는 마음이라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장에서 말하는 모면하려는 마음이 공포심이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은 이기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지치(政刑之治)에는 정형지치와 덕례지치가 모두 포함됩니다. 정형(政刑)이 필요조건이라면 덕례(德禮)는 충분조건입니다. 정형지치와 덕례지치를 모두 갖출 때 군자지치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공자의 언급은 왜 정형지치만으로 군자지치가 이뤄질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봐야 합니다. 군자지치가 지향하는 어진 정치란 결국 백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사람다운 마음을 갖추도록 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형만으로 이룰 수 없고 덕례를 함께 갖출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군자학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인 격(格)을 만나게 됩니다. 格은 본디 인간의 기도에 감응해 신이 강림하는 것(接神)을 형상화한 한자였기에 신이 ‘오다’와 ‘이르다’는 뜻을 갖게 됐습니다. 또 신의 뜻에 의해 일을 ‘바로 잡다’, ‘고치다’는 의미도 갖게 됐습니다. 여기서 그런 신의 뜻에 맞춰 감화되다, 감동하다는 뜻이 파생했습니다. 또 뭔가를 바로잡을 땐 저항이 발생하기에 ‘싸우다’는 뜻(격투)과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의 ‘구획하다’는 뜻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서 ‘재다’와 ‘헤아리다’, ‘깊이 연구하다’의 뜻이 나왔고. 다시 재는 행위와 관련해 ‘격자’, ‘격식’, ‘지위’, ‘자격’, ‘인격’ 등의 뜻도 파생됐습니다.
‘예기’ 33편 치의(緇衣) 제3장에는 이 장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무릇 백성을 덕으로 교화하고 예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격심’ 갖게 된다. 행정으로 교화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이 ‘둔심’을 갖게 된다(夫民敎之以德, 齊之以禮, 則民有格心. 敎之以政, 齊之以刑, 則民有遯心)’입니다. 둔심(遯心)은 달아나려는 마음을 뜻하니 이 장의 면(免), 즉 모면하려는 마음에 상응합니다. 격심(格心)은 그 반대어이니 맞서 싸우려는 마음,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헌데 이 장과 대조해 보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有恥)에 대응해야 하니 떳떳한 마음, 바른 마음이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格을 이해하기 위해선 또 고려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의 하나로 치지(致知)와 짝을 이루는 격물(格物)입니다. 격물의 격에 대해선 ‘헤아리다’와 ‘깊이 연구하다’를 적용하면 쉽게 풀립니다. 사물의 본질을 헤아리고 깊이 궁리한다는 뜻이 되는 거죠. 하지만 잠깐만, 그럼 왜 궁물(窮物)이라 하지 않고 격물이라 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격의 원래 뜻이 접신을 통한 깨달음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신이 내게 강림하듯 사물의 본질이 내게 강림하기를 바라며 간절히 궁구한다는 의미에서 격물이란 표현을 쓴 것 아닐까요? 칸트의 인식론을 빌려 말하면 물자체가 나의 인식체계라는 레이더망에 포착될 수 있는 형태로 현현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공자말씀 속 格의 일이관지한 의미는 무얼까요?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을 포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사로 쓰일 때는 그 대상과 혼연일치 또는 합치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을 뜻하고, 명사로 쓰일 때는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에 부합함 또는 도달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有恥且格에 적용했을 때 格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동사일 경우엔 목적어가 없기에 자동사로 풀어야 합니다. 이 경우 ‘바름에 이르다’ 내지 ‘감화되다’가 가장 적절합니다. 그런데 그 주체가 사람이란 점에서 그 둘을 아울러 ‘사람다워진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명사일 경우엔 有恥와 有格으로 대구를 이뤄야 하니 ‘바로잡음이 있다’ 내지 ‘사람다움을 갖추게 되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준해 격심(格心) 또한 ‘사람다운 마음’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원문의 道之以政과 道之以德의 道를 ‘인도하다’로 풀이합니다. 저는 ‘길을 연다’로 풀었습니다. 도와 덕이 합일된 상태가 어짊(仁)이라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道之以德은 결국 도와 덕의 합일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道之以德은 곧 도와 덕이 합일을 이룬 어진 정치(仁政)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道를 도의 동사형으로 봐 “길을 열다”로 풀이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