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위정(爲政) 제2장
공자가 말했다. “시삼백을 한 마디로 대신할 구절이 있다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이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시삼백(詩三百)은 ‘시경(詩經)’에 수록된 노래를 말합니다. 당시 전승되던 옛 노래 3000여 편에서 공자가 그 정수만 뽑아 311편을 엮은 것이 후대에 ‘시경’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311편 중 6편은 제목만 전하고 가사가 없어 정확히는 305편입니다.
사무사(思無邪)라는 표현은 실제 ‘시경’에 실린 시의 한 구절입니다. 노나라의 노래 4편을 엮은 ‘노송(魯頌)’ 중 하나인 ‘경(駉)’이란 시입니다. 駉은 말이 살지고 튼실하다는 형용사로 ‘살지고 튼튼한 수말이여’라는 뜻의 경경모마(駉駉牡馬)가 그 첫 구절이라 붙게 된 제목입니다.
목장에서 뛰노는 다양한 말들의 건강미 넘치는 모습을 찬미하는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 연의 마무리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강 사마사장(思無疆 思馬斯臧)’, ‘사무기 사마사재(思無期 思馬斯才)’, ‘사무역 사마사작(思無斁 思馬斯作)’, ‘사무사 사마사조(思無邪 思馬邪徂).’
여기서 반복적으로 쓰인 思는 음률을 맞추기 위한 발어사(發語詞)이기에 의미 없이 쓰였다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그에 따르면 네 구절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끝없이 달리니 좋은 말이로다!’, ‘쉼 없이 달리니 재주 있는 말이로다!’, ‘싫증 내지 않고 달리니 떨쳐 일어나는 말이로다!’, ‘삿된 기운이 없으니 잘 나아가는 말이로다!’
사무사는 그중에서 4연 마지막 구절의 일부입니다.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경’이 종묘제례악에 해당하는 송(頌)으로 분류됐다는 점에 착안해 시의 화자가 목장에서 훌륭한 공마(公馬)를 키운 노희공(노장공의 서장자)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래서 해당 구절도 ‘노희공의 생각에 삿됨이 없으니 그가 키우는 말도 앞만 보고 잘 달린다’는 식으로 풀면서 사무사에 대한 도덕주의적 해석을 가합니다. 시의 효용성이 사람의 악한 마음을 억누르고 착한 마음을 고양시켜 해 바른 성정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있다는 식입니다.
현대의 유학자들은 이런 도덕주의적 해석을 경계하며 원시의 뜻에 충실하게 사무사를 ‘삿된 기운이 없다’ 거나 ‘속임수가 없다’로 풀어냅니다. 자연 상태에서 건강한 말의 무념무상의 경지를 표현했다는 것이지요. 정반대로 ‘경’의 시구와 별개로 ‘시경’에 수록된 시들에 대한 공자의 개인적 감회를 풀어냈는데 우연히 일치한 것뿐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시 삼백을 줄줄 읊던 공자가 ‘사무사’가 ‘경’에 등장하는 시구절임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 구절을 ‘시경에 수록된 삼백 편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이라는 전혀 다른 문맥에 위치시켰을 때 전혀 다른 해석의 지평이 열리는 문학적 효과를 활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를 통해 원래의 시구절에선 췌사였던 思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됐으니 이 역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화법과 공명합니다. 창작하지 않고 원래 있던 그대로를 갖다 썼을 뿐인데 참신한 의미창출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자가 문학적 발췌를 통해 새로운 의미부여를 한 思無邪는 주희의 도덕주의적 해석에 부합할까요? 주희의 思無邪는 思正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고도 바른 마음이 담긴 노래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思無邪는 그와 다릅니다. 잡스러운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음을 담은 노래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도덕군자의 바른 성정이 담긴 노래가 아니라 보통사람의 희로애락애욕의 칠정(七情)이 가감 없이 녹아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사에 대한 이런 해석은 군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주희의 도덕군자는 백성의 감정을 정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냉철한 사람입니다. 반면 공자의 군자는 백성의 감정을 재단하기보다는 그 진솔한 감정에 공명할 줄 아는 가슴 뜨거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