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학이(學而) 제12장
유자가 말했다. “예의 쓰임 중에 조화가 가장 귀하다. 선왕지도의 아름다움도 여기에 있다. 작고 큰 예가 모두 이에 말미암는다.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조화만 알아 조화로워지려할 뿐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역시 통하지 않는다.”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지화이화 불이례절지 역불가행야
‘예기’ 악기(樂記)편에는 ‘악이란 같게 하는 것이요, 예란 다르게 하는 것이다. 같으면 서로 가까워지고, 다르면 서로 공경하게 된다(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악이 동질감을 확인하게 해주고 고무해준다면 예는 역할과 지위에 따라 상하와 본말을 분별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예가 질서, 악이 조화를 담당한다는 것과 공명하는 내용입니다.
헌데 유자는 여기서 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질서가 아니라 조화라고 합니다. 그래놓고선 뒷부분에서는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조화를 추구하는 예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니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얼핏 졸가리 없어 보이는 이 발언에 중대한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법은 맨 앞에 언급한 예는 예악(禮樂)의 통합적 표현으로 푸는 것입니다. 유약이 선왕지도(先王之道)로 표현한 것 또한 예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사실 춘추시대 이전 의전(예)의 대다수는 악과 연계돼 있습니다. 심지어 임금이 식사할 때조차 끼니별로 연주와 노래가 달랐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예악을 한단어로 줄이면 예가 되는 것입다.
재밌는 점은 예악이란 표현에도 드러나듯 예가 악을 앞서건만 악의 역할인 조화가 예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점입니다. 예가 너무 번거롭고 딱딱하다고 여기는 제자들이 많아서 그들을 달래기 위함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악기 편의 다음 내용이 그를 뒷받침합니다.
‘악이란 조화를 돈독히 하는 것으로 신을 따르고 하늘을 따른다. 예란 마땅한 것을 분별하는 것으로 귀신에 대응하며 땅을 따른다(樂者敦和, 率神而從天. 禮者別宜, 居鬼而從地).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에 응하여 악을 만들고, 땅에 짝 맞춰 예를 제정했다. 예와 악을 밝게 갖춰야 하늘과 땅이 관장하는 바를 알 수 있다(故聖人作樂以應天, 制禮以配, 禮樂明備 天地官矣).’
하늘(天)과 신(神)에 부응하는 것이 악이고 땅(地)과 귀신(鬼)에 부합하는 것이 예이니 당연히 악이 예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가 지상의 척도라면 악은 천상의 율려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자가 왜 그토록 악에 심취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인 것이 아니라 천명을 알기 위해 그 율려의 비의를 깨치기 위한 방도였던 것입니다.
유약의 마지막 발언은 악이 양(陽)이고 예가 음(陰)임을 폭로합니다. ‘조화를 위한 조화’, 즉 형식적인 조화를 방지하기 위해 예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악의 원리를 실현함에 있어 예가 고삐와 채찍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악기 편에서도 확인됩니다. ‘악은 천지의 조화며, 예는 천지의 질서다. 조화로 만물이 존재하고, 질서로 만물이 분별된다(樂者天地之和也, 禮者天地之序也. 和故百物皆化 序故群物皆別),’ 조화가 먼저고 질서는 다음이니 악이 몸통이고 예는 꼬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예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질서를 관장하는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수면 아래 조화를 관장하는 악이 진짜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대의 유학자들이 악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면서 눈에 보이는 예에만 집착한 나머지 군신과 부자, 부부 간의 차별만 강조하는 강퍅한 예가 득세하게 된 것입니다. 공자는 단 한명의 제자도 파문하지 않았건만 맹자와 주자는 제자들에게 왜 그리 매섭고 혹독했는지 그 이유도 깨닫게 됩니다. 우주의 하모니를 모르고 시적 상상력이 부족한 책상물림은 도덕군자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